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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Dec 19. 2022

인도에서 생긴 일(15)

청춘의 기록

 모래를 침대 삼아 별빛을 이불 삼아 잠자리에 들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텐트도 없이 침낭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사실 생고생이 따로 없지만 몸이 조금 힘들 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력서를 빛내줄 어려운 자격증 하나를 따낸 것만큼 뿌듯했다. 아무 고민이 없는 상태, 현실에서 허덕이던 걱정들이 별똥별과 함께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침낭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백지상태의 머리로 잠드는 것이 얼마만인가. 미소를 머금은 채 슬슬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별들이 내 발밑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난 별 과자를 먹으며 밤을 만끽했다. 하지만 이내 별 과자들은 별 얼음으로 변했다. 이가 딱딱 갈릴 정도로 몸의 온도가 급속히 내려갔다. 나는 덜덜 떨며 별 얼음을 하늘에 다시 던졌다. 하늘로 쏘아 올린 별 얼음은 다시 까만 밤에 촘촘히 박혀 제 빛을 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덜덜 떨리는 몸이 멈추지 않는다. 왜 이렇게 추워. 그렇게 잠에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막의 혹독한 밤 추위에 이를 덜덜 갈며 잠에서 깨어났다.


 도저히 침낭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스스로의 체온으로 차가워진 다른 몸뚱이들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들도 추위에 깼는지 아직 잠에 들지 않은 것인지 주변에서 조금 어수선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너무 추워서 안 되겠다. 남는 옷이라도 빌릴 요량으로 침낭을 나오려는 그때,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요? 사막 투어에서 그렇게 연인이 많이 나온다던데요.”


 걸걸하지만 앳된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기차에서 만난 여자의 남자 친구인 듯했다. 남자들은 따로 남은 술들을 모아 늦은 밤 회식을 즐기는 중이었나 보다.


 “뭐,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다 같은 여행자들이고, 여기 떠나면 헤어질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나. 그나저나 여자 친구랑 와서 좋겠어요. 이런 추억도 만들고.”


 주언의 목소리다. 내내 날 설레게 하던. 생각해보니 내가 주언에게 자꾸 마음이 끌렸던 것은 저 지랄 맞을 정도로 멋진 목소리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목소리에 홀려 남자 친구를 사귄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는 목소리에 민감하고 소리에도 예민하다. 그래서 이렇게 또 듣지 말아야 할 말들을 애써 듣고 있다.


 “뭥미. 나한테 말한 거랑 다르잖아. 새끼가 멋있는 척하고 있네. 너 저기 뭐야, 이름 뭐더라.”


 톡톡 쏘는듯한 말투, 영인이다. 근데 왜 말을 하다 말아. 그 이름이 누군데. 나는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고, 한편으로 매우 떨렸다. 이 떨림은 추위 때문이 아니다. 그 이름이 혹시 내 이름은 아닐까,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기다리는 심정과 비슷한 떨림이었다. 결국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이번엔 내 이름이 불리길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나는 주언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왔다고 기대했다.


 “그 뭐야, 나 이름 왜 갑자기 기억이 안나지. 취했나.”


 빨리 기억해내라고. 빨리 말해! 당장이라도 침낭을 박차고 뛰어나가 영인의 멱살을 흔들며 기억해내라고 사자후를 날리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들이 그런 나를 단단히 붙들어주었다. 다행이다. 이성의 끈이 풀어졌다면 창피함에 혼자 낙타를 다그닥 다그닥 타고 한밤의 사막질주를 했을지도 모른다.


 “됐어. 그만해, 새끼야. 그런 말은 뭐하러 하냐.”


 주언이 영인의 입을 막아섰다. 아니, 그냥 둬보지. 성격이 급하네. 어쩜, 그것도 나랑 잘 맞잖아. 결국 주언의 제지에 그 이름이 무엇인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숨죽여 몇십여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지만, 군대 얘기, 축구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밖에 들을 수 없었다. 과연 주언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걸까. 그리고 그 상대가 나이긴 한 걸까. 답을 듣지 못한 채 밤이 깊어갔다.


 새벽녘이 되자 온도는 더 차가워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고 느낄 때쯤 내 침낭 위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가 나를 포근히 누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지자 점점 눈이 감겨왔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건 여자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으악! 여기 다 똥밭이야! 웬 똥이야, 이게.”


 여자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이미 나 빼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여자의 남자 친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낙타 혹을 칸막이 삼아 다들 여기서 싸셨구먼요.”


 엊저녁 낙타 무리가 있던 자리에는 가지각색의 대변이 늘어서 있었다. 나 말고도 여러 차례 사람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내 옆에 서있는 한인식당에서 봤던 여자 한 명도 큼큼 헛기침을 하며 허공을 바라보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공범이자 동지인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원활한 배변활동에 무언의 응원을 보내며 다음 일정을 위해 짐을 정리하러 침낭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자리엔 주언이 있었다. 주언이었다. 주언이 내 침낭 위에 얹어있던 두툼한 담요를 걷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나를 포근히 누르던 정체는 주언의 담요였던 것이다. 주언을 부르려다 괜히 민망해할까 걱정되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듄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산책을 해야겠다.


 “산책 가려고? 같이 가시죠.”


 먼발치서 영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어왔다. 그 말에 주언이 담요를 개다 말고 영인을 쳐다봤다.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주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야, 주언아. 내 껏도 좀 정리해줘. 나 듄에 올라갔다 올게.”


 영인이 주언을 향해 소리쳤다. 주언은 뒤돈 상태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영인은 짧은 욕 몇 마디를 날리더니 이내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주언없이 영인과 함께 듄으로 향했다. 영인이에게 물어볼까. 어제 그 이름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하지만 물어봤다간 남의 얘기나 엿듣는 음흉한 사람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사진이나 찍자. 영인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조금 찝찝하지만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이제 하루 남았다. 사막을 떠나게 되면 우리도 모두 흩어지게 되겠지. 그리고 또 다른 일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늘 그랬듯이. 여행은 예측 불가하다. 그래서 내일이 더 기대된다. 오늘은 어떤 일이 펼쳐질까. 


 “같이 찍으시죠. 자 카메라 보고.”


 영인이 내 옆에 서서 카메라를 들이민다. 렌즈에 비친 나와 영인의 모습은 청춘 그 자체였다. 꼬질꼬질하지만 싱그러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의 기록을 위해 나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찰칵.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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