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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Dec 14. 2022

인도에서 생긴 일(14)

소원을 말해봐

 “오, 오지 마! 세요! 오지 마세요! 오지 말라고!!”


 까만 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팥죽 속 경단처럼 허연 엉덩이 두쪽을 드러내고 온 우주의 힘을 항문 한가운데로 모으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멀리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하호호 웃는 소리보다 훨씬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다. 누군가 낙타 무리 가운데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급해진 나는 정체모를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괜찮아? 너무 안 오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주언의 목소리였다. 망했다. 낙타 무리 뒤에서 볼일을 보는 터라 내 엉덩이가 보이진 않겠지만, 항문 사이 비집고 나온 덩어리들의 냄새는 필시 맡았을 것이다. 여기서 나의 설렘이 끝나는구나. 인도 사막 한가운데서 똥 싸다가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썰을 신춘문예에 내면 심사위원들이 불쌍해서라도 뽑아주지 않을까. 당장의 상황에서 회피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실은 여전히 사막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까고 설렘을 느끼는 남자와 대치중이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현실이 있을까. 악몽도 이렇게는 못 꿀 것이다. 이미 망한 설렘,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대답했다.


 “응, 괜찮아. 아까 저녁에 먹은 모래 카레 때문에 속이 좋지 않네. 제발 저쪽으로 가주지 않겠니.”


 굉장히 이성적인 대처였다. 차분하고 현명했다. 노련하고 세련된 말투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렇게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긴 개뿔, 제발 가라 가! 주언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발길을 돌리는지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언뜻 불빛에 비춘 주언의 손이 코를 막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착각이겠지. 그냥 머쓱해서 코를 잠시 만진 것뿐이겠지. 콧구멍을 틀어막은 것은 아닐 거야. 땀나도록 힘을 주어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 뒤처리를 하려는 찰나, 무언가 내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뭐지? 누구세요? 누구야!”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손으로 내 엉덩이를 만진 것일까? 일행 중 한 명인가? 아님 또 다른 사람일까? 그때였다. 다시 무엇인가가 내 엉덩이에 밀착하는 기분이 느껴졌다. 축축했고 불쾌했다. 재빨리 몸을 돌려 정체를 확인했다. 


 “야!”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낙타였다. 낙타가 혀로 내 엉덩이를 핥은 것이다. 휴지가 없는 줄 알고 호의를 베풀어준 것일까. 고맙기보단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낙타는 날 한번 노려보더니 입을 꾹 닫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밝으면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영인이 묻는다. 덕분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이 새끼는 눈치가 빠른 것 같으면서도 눈치가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쿨하게 볼일 보고 왔다고 말하려는데 주언이 급하게 말을 막아섰다.


 “닭다리 진짜 맛있는데. 먹어봐. 럼주랑 먹으니까 더 좋다.”


 주언이 은박지를 반쯤 벗겨낸 닭다리를 건네준다. 무언의 미소를 보내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육즙이 좔좔 흐르면서 쫄깃한 식감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닭다리를 채 삼키기 전에 낮에 미리 구입해놓은 럼주를 병째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환상이란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속을 비워낸 뒤 먹는 것이라 더 맛있었다. 주언이 은박지를 까줘서 더 맛있을지도. 주언은 말없이 자신의 럼주 병을 들어 보이며 건배를 제안했다. 그러자 영인이 끼어들어 건배사를 외친다.


 “자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다 같이 짠 할까? 아까 우리끼리 하긴 했는데, 어디 갔다 왔는지 몰라도 암튼 이제야 다 모였으니 한 번 더 짠해요.”


 영인이 이 새끼는 눈치가 없는 게 분명하다. 영인의 건배 제안으로 분위기는 한층 더 밝아졌다. 서로 병을 부딪치며 눈빛을 나누며 사막의 고요한 밤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실로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추억이다. 


 "근데 다들 하는 일이 어떻게 돼요? 학생? 아님 회사원? 백수? 일단 저는 취준생, 그러나! 최종합격해서 첫 사회생활 앞두고 여행오게 됐어요. 우리 베프들이랑."


영인은 군 전역 후 개강 텀이 아주 잘 맞아서 또래보다 사회진출이 조금 빨랐다고. 운좋게 취업까지 빨리되어 같은 나이 남자친구들 중 가장 먼저 사회로 진출하게 됐다고 했다. 가볍게만 보였는데,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야, 너 진짜 성실하게 학교생활 잘 했나보다. 하긴, 좀 가벼워 보이면서도 은근 똑똑한 구석이 보였지."


"아, 뭐가요. 참나 저를 뭘로 보시고. 주언이 저 자식이 워낙 차분하고 모범생처럼 보여서 비교가 돼서 그렇지 저도 나름 괜찮거든요. 쟤는 하여간 전공도 재미없는거 해서 밥이나 먹고 살란가 모르겠다. 하, 주언아 형이 첫월급타면 용돈 좀 줄게. 걱정말고 넌 공부나 열심히 해."


영인은 화살을 주언에게 돌렸다. 주언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아, 저는 가구만드는 전공인데. 아직 졸업은 못해서요."


"못했다기보단, 안했지. 얘는 학교가 좋은가 봐. 대학 졸업했으면 됐지, 석사는 왜...왜..노예의 길을..."


가구만드는 전공이라. 정확하게 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왠지 주언과 어울리는 전공이었다. 뭐, 영인의 말처럼 재미없는 전공인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다들 각자 자기소개를 한창 하고 있는 와중에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탄성을 질렀다.


 “와 하늘 좀 봐. 미쳤다. 미쳤어. 미쳤다리.”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까만 밤하늘엔 하늘이 차지하는 공간보다 별이 더 많았다. 빽빽하게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들 사이로 10초에 한 번씩 별똥별이 떨어져 내렸다.


 “우와.”

 “와....”

 “너무 예쁘다...”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 모두는 소원을 비느라 잠시 침묵했다. 눈을 감았고 두 손을 모았다. 칠흑 같은 밤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인도 사막에 와서 처음 깨달았다. 이 순간, 이 공간에 같이 있는다면 없던 로맨스도 피어날 것이다. 내 옆에는 주언이 있었고, 주언의 옆에는 내가 있었다. 비록 조금 전 민망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 일들이 까맣게 잊힐 만큼 우리의 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소원은 하나다. 어느 시트콤의 결말처럼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주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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