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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Jan 17. 2023

인도에서 생긴 일(17)

버스는 계속 달린다

조드푸르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찌뿌둥한 몸을 풀고 연신 스트레칭을 해댔다. 영인과 주언도 내 옆에 서서 함께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영인이 팔을 하늘높이 길게 뻗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잘난 체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나 좀 멋있었지? 너 표정이 진짜 가관이었거든. 그래서 내가 배려 좀 해줬지. 반한 건 아니지? 그건 좀 곤란해.”


영인은 친해질수록 얄미워지는 스타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엎드려 절 받기네. 암튼 무사히 왔으니 됐다. 벌써 저녁 8시야. 넌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나랑 주언이는 여기서 하루 이틀 정도 있다가 아그라로 가려고. 인도에 왔으니 타지마할은 한 번 봐줘야지!”


내가 주언을 만나기 위해 포기했던 아그라. 그들은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에 아그라를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조금 부러웠다. 내가 애초에 인도에 온 목적도 아그라에 가서 타지마할을 가는 것이었으니.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다시 선로를 바꿔 아그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지마할 대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에 만족했다. 때문에 원래 계획대로 푸쉬카르에 갈 것이다.


“푸쉬카르 갈 거야. 난 여기서 잘 계획은 없어서. 바로 버스 갈아타고 가려고. 버스표부터 사야겠다.”


“잠깐만, 푸쉬카르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다고?”


영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돌으려는 나를 멈춰 세웠다. 뭐야, 또. 왜, 또 뭔데. 너 뭐 돼? 


“이 밤에 혼자 간다고? 님 제정신?”


조드푸르에서 푸쉬카르까지 직행으로 가는 버스는 많지 않다. 새벽 6~7시쯤 출발하는 로컬버스가 있었고, 밤 10시에 출발하는 야간버스가 하나 있었다. 그중 난 야간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왠지 조드푸르에서는 하루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딱히 볼거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푸쉬카르에 빨리 가고 싶었다. 버스에서는 한숨 자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매우 안일했음을 영인의 잔소리를 듣고 깨닫게 됐다. 여자 혼자 밤에 인도야간버스를 탄다니. 인도여행 첫날 납치 아닌 납치 해프닝을 겪었던 것을 벌써 잊었던가. 


“그래. 너무 위험한데. 여기서 하루자고 새벽 일찍 가. 아니, 그것도 위험한가. 아님 아즈메르까지 가는 버스는 많으니까 내일 오전에 아즈메르행 버스타고 푸쉬카르가는 버스 갈아타면 되겠네.”


조드푸르에서 푸쉬카르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얼마 없는 푸쉬카르 직행버스를 타던가. 꽤 자주 운행하는 아즈메르행 버스를 타고 다시 푸쉬카르로 가는 버스를 타던가. 아즈메르에서 푸쉬카르까지는 15km 남짓 거리이기에 그다지 번거로운 여정은 아니다. 주언의 말대로 내일 오전에 아즈메르로 가는 버스를 타야하나.


“음……. 아니면…….”


영인이 입을 씰룩거린다. 왜, 또, 뭐. 무슨 말을 할 건데. 잔소리라면 넣어둬. 나도 내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느끼고 있다고요.


“내가 데려다줄까?”


내가 잘못들은 것은 아니겠지. 이게 무슨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내버스 24번 갈아타고 가는 소리람. 물론 인도에 오기 삼주 전쯤 실제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내버스만 24번 갈아타고 갔다와보긴 했으나,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니 웃음도 안 나왔다. 조드푸르에서 푸쉬카르가 연남동에서 상수동 거리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데려다준다고? 아니 어떻게 데려다 준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같이 버스타고 가자고. 야간버스. 재밌을 것 같은데. 푸쉬카르 갔다가 다시 아즈메르가는 버스타고 여기로 넘어오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무리한 일정은 아닌 거 같은데. 아그라 가는 기차시간에도 문제없이 맞출 수 있고. 어차피 여기 호텔도 예약 안했어.”


영인은 자꾸 비현실적인 말만 떠벌렸다. 갑자기 야간버스가 재밌을 것 같다며 같이 타고 가자니. 족히 다섯 시간은 넘는 거리다. 도착하면 새벽에나 떨어질 텐데. 하지만 이해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나도 인도로 떠나온 가장 중요한 목적인 타지마할을 포기하면 급하게 주언을 따라 자이살메르까지 충동적으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무릇 여행의 재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정색을 하며 영인을 말리려던 것을 멈추고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뭐, 같이 가자. 버스 자리 있는지부터 확인해봐야겠네.”


“야, 주언아. 가자. 버스표 사러.”


“어……?”


순간 주언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목격했다. 주언은 영인도 나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상황자체가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멍한 얼굴로 잠시 서있던 주언은 체념한 것인지 버스표를 알아보러 움직였다. 


“얘들아, 나 화장실 갔다올게!”


갑자기 너무 신이 났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친구와 왠지 모를 끌림이 자꾸만 느껴지는 한 남자와 함께 즉흥 여행을 가게 된다니. 물론 나는 계획 하에 떠나는 거지만 내 계획에 영인과 주언은 없었지 않은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여행에 엔도르핀이 마구 솟구쳐 나왔다. 그리고 엔도르핀이 돌자 급 소변이 마려워져 화장실로 급히 걸어갔다.


화장실 앞에는 인도 여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다. 유료화장실인 것이다. 인도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은 대부분 유료화장실로 운영된다. 그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겠지. 여자의 손에 동전 몇 개를 올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비어있는 칸이 얼마 없었다. 다리를 꼬며 저 멀리 한 칸 남은 곳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급히 바지를 내리려다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악!”


변기 안쪽에 이미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돈을 내고 타인의 흔적을 감상하게 됐다. 이게 그렇게 유의미한 변인 것일까. 간디의 변이라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여기는 인도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노 프라블럼. 조금 찝찝했지만 자연스럽게 일처리를 마쳤다. 이로서 진정 인도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버스스테이션 앞에서 영인과 주언이 버스표 세 장을 손에 쥐고 서 있었다. 신난다. 우리는 야간버스를 기다리며 야외 의자 앞에 쪼르르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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