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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Jan 19. 2023

인도에서 생긴 일(18)

중요한 것은 싸겠다는 마음

푸쉬카르로 가는 밤 버스는 고요했고 평온했다. 특히나 2층 슬리퍼칸에 들어와 문을 닫고 누워있으니 온 세상이 평화로워 보였다. 운 좋게도 버스가 그나마 최신식이어서 나름대로 낭만을 즐길만한 수준이었다. 낡은 버스였다면 다 해진 매트리스의 쿰쿰한 냄새에 코를 막기 바빴을 테니까. 나는 1인용 슬리퍼칸에, 영인과 주언은 맞은편 2인용 슬리퍼칸에 타게 됐다. 때문에 혼자였지만 바로 마주 보고 있었기에 충분히 든든했다. 


인도의 장거리 운행버스에는 대개 슬리퍼칸이 마련되어 있다. 1층은 일반 좌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은 슬리퍼칸, 말 그대로 누워서 갈 수 있는 매트리스가 깔린 긴 좌석이 자리한다. 일반 좌석과 마찬가지로 안에 창문이 있어서 환기도 시킬 수 있으며, 바깥쪽에도 문이 있어서 이동 내내 문을 닫고 편히 갈 수 있다. 2층을 오르내릴 때는 사다리를 이용하면 된다.


푸쉬카르까지의 예상 이동시간은 5~6시간이지만, 이곳은 인도이기 때문에 7~8시간 정도는 잡아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때에 따라 10시간씩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는 인도니까 그런 것쯤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 내내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탁상용 알람시계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기차시간과 같은 중요시간에 알람을 맞춰두고 다녔다. 그 방법이 가장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시계만 하염없이 바라보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인도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일이기에.


인도에서 기차가 연착하는 이유는 대개 식사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밥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처음에 식사를 신청하는 서비스가 있기에 기내식처럼 만들어놓은 밥을 데워주거나 미리 도시락을 구비해서 나눠주는 줄 알았더니, 식사시간이 가까워오자 기차를 세우고 기찻길 돌무더기 위에 불을 붙이더니 밥을 직접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충격이란. 


그렇다면 인도의 버스가 연착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화장실 때문이다. 버스에는 따로 화장실이 없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 휴게소가 마련된 것도 아니어서 승객이 원할 때마다 혹은 기사가 필요할 때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길거리에서 소변파티를 열곤 한다. 오늘처럼 6~7시간을 가는 일정이면 그나마 덜하지만 12시간 넘게 이동하는 거리는 화장실 때문에 가다 서다를 열댓 번도 넘게 반복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번 이동시간은 그나마 짧은 거리이니 화장실 때문에 애먹을 일은 없겠지. 게다가 출발하기 전 이미 볼일도 끝마쳤고 말이야. 맞은편 복도 쪽으로 누워있는 주언과 눈이 마주쳤다. 주언이 입모양으로 말을 건넨다.


‘얼른 자-’


‘너. 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눈을 감았다. 설렌다. 간질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이제 한숨 자고 일어나면 푸쉬카르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단잠에 빠져들었는데, 큰일이다. 일이 벌어졌다. 내 방광은 소변으로 가득했다. 빵빵해진 방광 덕분에 강제 기상을 하게 된 것이다. 창밖을 보니 아직도 어두웠다. 탁상시계 알람이 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도착시간이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일까. 


때마침 인도인 한 명이 기사 쪽에 다가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었다. 기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아직도 멀었다고 답했다. 아직 반도 안 왔다며 들어가서 앉으란다. 아직 반도 안 왔다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11시가 다되어 출발했으니 4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 반도 안 온 거 실화 맞나요. 기사님 이게 최선이었나요? 제가 자는 동안 도대체 뭘 하신 건가요. 기사님도 차를 세우고 주무셨나요? 조금 빨리 가주실 수 없었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방광을 부여잡고 기사님께 내적 컴플레인을 걸며 빨리 어디라도 도착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잠들었는데, 방광을 부여잡고 깨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설레는 감정도 와장창 깨져버렸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썸 따위가 아니다. 오직 내게 필요한 것은 화장실뿐. 그 무엇도 다 필요 없다. 지금 내게 화장실 이외의 것은 모두 사치에 불과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주언과 영인은 여전히 단잠에 빠져있는 듯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다리를 비비 꼬며 땀을 삐질 삐질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도착할 때까지 제발 깨지 말았으면.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그때였다. 아까 그 인도인이 다시 기사에게로 향했다. 버스를 세워달란다. 그러자 좌석 여기저기서 자기들도 가겠다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버스기사는 얕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금만 더 가서 세워준다고 했다. 그렇게 또 10여분을 달렸다. 그러자 승객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빨리 세우라며 서너 명이 문 앞까지 가서 발을 동동거렸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잠시 후, 버스가 정차했다. 버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드디어 볼 일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 볼 일을 볼 생각이었다. 창밖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황량한 도로 한복판 갓길에 정차한 것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앞 다퉈 버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모두 버스를 등지고 일렬로 서서 시원하게 소변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절망적이었다. 모두 남자였고, 몸을 가릴 가느다란 나무도 하나없는 탁트인 벌판이었기에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주언과 영인도 잠에서 깨어났다.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묻기에 버스가 도로에 정차 중이고, 승객들이 볼 일을 보는 중이라 알려줬다.


“그래? 잘됐다. 야야, 주언아 내려가자. 내려가. 나도 하고 와야겠다.”


“그럴까? 그러자. 몸도 찌뿌둥하고 기지개도 켤 겸 나갔다 오자고.”


둘은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신발까지 꺾어 신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중간에 주언과 눈이 마주쳤지만 괜찮은 척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정말 난 여기서 끝인가. 이러다 바지에 싸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너무 부럽다. 다음 생에는 나도 남자로 태어나서 길에서 노상방뇨 해봐야겠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버스기사는 이제 나갈 사람 없냐며 곧 출발하겠다고 했다. 버스 밖에서는 볼일을 마친 남자승객들이 기지개를 켜고 담배를 피우며 해피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저 담뱃불들이 하나둘씩 꺼지면 버스가 곧 출발하겠지. 이렇게 몇 시간을 더 달려야 도착할 테고. 어쩐다. 소변을 너무 참아서 얼굴이 창백하기에 이르렀을 때, 맨 뒤에서 외국인 여성승객이 쭈뼛쭈뼛 거리며 버스 밖으로 나섰다. 나, 나도. 잠깐만요. 파란 눈 언니! 무슨 용기였을까. 그 모습에 나도 얼른 따라나섰다. 2층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려와 여성승객의 뒤를 따랐다.


“어? 왜 나왔어. 바람 좀 쐬려고?”


하... 주언이다. 눈치가 없는 것일까. 아님 내가 노상방뇨를 할 것이란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주언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어. 아니. 나... 볼... 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언과 영인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뭐지. 궁금할 틈도 없이 내 신발 옆으로 폭포 같은 물줄기들이 쏟아져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랬다. 파란 눈의 언니였다. 파란 눈의 언니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 흔한 잡풀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버스를 등 진채로 허연 엉덩이 두 쪽을 당당히 내놓고 과감히 볼 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나도 급히 방광을 부여잡고 영인과 주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가!”


“어?”


“왜...? 뭔데. 왜 그래.”


“들어가라고.”


“응?”


“쉬 마렵다고. 쌀 거라고. 나도... 들어가. 제발.”


막판엔 배에 힘을 주느라 거의 우는 목소리로 말하는 날 보며 영인이 재빨리 주언의 팔을 끌고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둘의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버스를 등지고 팬티를 내렸다. 


쏴아아 아아.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그 소리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만 빼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다행히 주언과 영인은 슬리퍼칸에 들어가 등을 돌린듯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수많은 인도 남자들이 버스 창문에 달라붙어 내 엉덩이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낄낄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너무나 수치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단 싸고 보자. 중요한 것은 싸겠다는 마음. 중싸마, 그것 아니겠는가. 


볼일을 마치고 얼른 팬티와 바지를 얼른 끌어올렸다. 인도 남자들은 여전히 날 보며 웃고 있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큰일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어차피 저들은 내 얼굴도 기억 못 할 것이고, 버스에서 내리면 평생 볼 사이도 아니니 괜찮.... 긴 개뿔. 너무나 창피했다. 


벌게진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버스 문이 닫혔고, 곧 출발했다. 차마 주언과 영인 쪽으로 몸을 돌릴 수가 없어서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왜 버스를 같이 타 가지고. 차라리 혼자 올 것을.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설레는 남자 앞에서 이게 웬 개망신인가. 꿈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볼을 세게 꼬집어 비틀어 봐도 얼얼함이 더욱 생생하게만 느껴질 뿐 나는 여전히 푸쉬카르로 달리는 버스 안에 있었으며, 내 맞은편 자리엔 여전히 어색하게 굳어있는 주언과 영인의 등이 보일 뿐이었다. 버스가 달리는 내내 머릿속에는 그냥 한국 갈까, 이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어색하게 등 돌리며 자는 척을 한지 두어 시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푸쉬카르에 도착했다. 내 계획은 버스 문이 열리면 최대한 뭉그적거리다가 가장 나중에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어디로든 냅다 뛸 것이다.


푸시시시식-


버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계획대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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