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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Feb 20. 2023

인도에서 생긴 일(20)

고아로 가는 길

“언니! 여기서 다 만나네. 뭐야, 왜 또 델리야?”


다시 델리에 돌아와 빠하르간지에 있는 한인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막 투어까지 함께 했던, 이제는 소영이라고 부르게 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는 연하의 남자친구도 함께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나 다시 갈 곳이 있는데, 푸쉬카르에선 교통편이 없어서 델리로 넘어왔어. 둘은 어떻게 된 거야? 친구들은?


“말도 마세요, 누나. 레스토랑에서 밥 먹다가 짐 다 털려서 난리도 아니었어요. 다행히 저희는 짐을 따로 놔두고 쇠사슬로 묶어 놨었는데, 친구들은 두 커플 다 바깥쪽에다 무방비로 놔두는 바람에 여권도 없어져서 지금 대사관 가있어요. 저희가 여윳돈 남겨놨던 거 싹싹 긁어줘서 보냈고 저희는 이제 저희끼리 다시 여행 이어가려고 빠하르간지로 왔어요.”


소영 커플의 여행담은 자이살메르에서 헤어진 지 단 며칠 만에 깜짝 놀랄만한 에피소드가 또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니, 친구들 돈 찾아서 주려고 은행을 갔거든? 근데 내가 우리 자기랑 약간 포옹하는 것처럼 붙어 있었단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제가 뒤에서 백허그를 하고 있었어요.”


소영 커플은 여전히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을 자세히도 읊었다.


“그래, 맞다. 백허그, 자기야. 근데 그거 한 번 했다고 은행 안에 있던 경찰이 우리한테 긴 장총을 까딱까딱 겨누면서 떨어지라고 하더라니까?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무서워서 바로 떨어졌어요. 손 번쩍 들고 뒷걸음질 치면서...제 일생일대 최대 굴욕적인 순간이었네요.”


소영의 남자친구는 상황을 복기하면서도 여전히 부끄럽고 그 때 그 기억이 억울했는지 얼굴까지 벌게지며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진짜 보수적인 나라구나. 근데 성범죄엔 관대하고. 알 수 없는 곳이다. 진짜.”


그들이 겪은 여행담과 내가 눈으로 겪은 바를 종합해보면 인도는 여자의 행동이나 옷차림에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남자들이 여자를 성적으로 취하는 것에는 관대하다. 실제로 길가는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놀이로 즐기는 부류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뭐, 어쩌겠어. 아직 여성인권이 처참한 수준인 곳이니. 언니도 혼자 다닐 때 조심해.”


여태까지 혼자 인도배낭여행을 하면서 다행히 좋은 일행들을 만나왔기에, 그리고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안전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자고 이곳을 혼자 올 생각을 했는지, 한 달 전 인도배낭여행을 결정하고 감행한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이, 쏘영 커플도 왔네. 안 그래도 사막 패밀리들이 다 떠나서 좀 허전했는데, 다시 보니까 좋네. 기다려봐. 내가 김치 부침개 하나 해다 줄게.”


한인식당 매니저 형님은 내게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가져다주다 소영이네 커플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계란말이 플러스 김치 부침개까지 득템할 수 있었다. 


“언니 이제 어디로 가는데?”


“남쪽으로 가려고. 고아.”


“이야, 휴양지! 어느 해변으로 가실 거예요?”


소영이네 커플과 다음 일정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매니저 형님까지 합세 해 술판을 벌였다. 술판이라 봤자 각자 킹피셔 맥주 한두 병이 다였지만. 모두 사막에서 함께 지낸 멤버들이라 그런지 그때 그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근데, 너 고아로 간다고? 주언이랑 영인이도 거기 간다던 것 같은데. 처음에 같이 여행 온 희정이란 여자애랑 같이.”


그랬다. 주언이 내게 건네준 쪽지는 주언 혼자만의 일정표가 아닌, 영인과 희정이란 이름의 오랜 여사친과 셋이 함께 하는 일정이었다. 쪽지 안에도 그들의 이름이 등장했기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쪽지는 내게 건네주기 위해 따로 쓴 쪽지가 아니라 그들끼리 여행일정을 함께 짜며 이런저런 메모까지 적혀있는 진짜 여행 계획표였다. 


“아, 알아요. 아마 일정 겹칠 거예요. 제가 내일 델리에서 떠나면 고아에는 글피쯤 떨어지니까 어느 해변에서든 마주치겠죠, 뭐.”


인도 남쪽은 휴양지다. 그중 고아는 여러 해변이 모여 있는 곳으로 유럽 여행객들이 휴가 때마다 별장을 두고 한두 달씩 머무르기도 하는 휴양도시로도 유명하다. 고아 안에는 만드렘이나 안주나, 바가토르, 아람볼, 꼴바, 바가, 아곤다, 베나울림 등 이국적인 풍취가 가득한 해변이 100여km나 이어져 있다. 


주언의 일행과 그 드넓은 해변 중 어디서 만날지는 모른다. 일정표 쪽지 안에는 서너 개의 해변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중 한 곳을 가려는 듯 보였다. 고아 일정표에는 아직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는지 해변 이름 앞에 동그라미 대신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근데, 매니저 오빠. 영인오빠가 언니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아요?”


“맞아, 나도 느꼈는데. 영인이 형이 누나 유독 챙겼잖아.”


소영이네 커플은 또 다시 입이 근질거렸는지 이번엔 나와 영인을 두고 러브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막에서도 그런 낌새가 있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나는 영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영인이가 모두에게 두루두루 잘 해주긴 하지. 틱틱 거려도 결국 사람 잘 챙기는 정 많은 애라서. 내가 봐도 영인이가 관심이 없어보이진 않더라고.”


“에이~ 너무 뜨뜻미지근한 대답 아니에요? 매니저 형님은 알고 계실 거 같은데. 영인이 형이랑 주언이 형이랑 친하잖아요.”


그들은 나의 의견이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러브라인이 그저 흥미로울 뿐이었다. 여기가 나는솔로나 환승연애 촬영지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딜 가나 이런 사람들이 있다. 솔로남녀들을 엮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 그리고 그것에 대리 설렘이나 만족을 느끼며 호들갑스럽게 사귀라고 밀어붙이기도 한다. 


“저기,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은 거 맞지?”


“아니, 언니 왜. 영인이 오빠 너무 괜찮지 않아? 그치 자기야?”


“아니, 자기야. 영인이 형이 좋다는 거야? 나를 두고?”


“그게 아니잖아. 자기야. 내 말은 언니랑 영인오빠랑 잘 어울린다는 뜻이지. 왜 이렇게 말의 행간을 못 읽어, 자기야? 나한텐 자기가 제일 멋진 거 몰라?”


“고마워, 자기야.”


소영이네 커플은 늘 이런 식이다. 결국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자기들 사랑 놀음으로 판이 바뀐다. 그래, 마음껏 사랑하렴.


“암튼 고생하겠다. 델리에서 고아까지 기차로 40시간 정도 걸리지 않아? 조심해서 다녀와. 한국인 일행 꼭 같이 움직이고. 내가 내일 기차로 고아가는 한국 손님들 오면 네 얘기 해놓을 테니까 낼 기차 타기 전에 여기 한 번 더 들렀다 가라. 알겠지?”


한인식당 매니저 형님은 혼자 긴 시간 기차를 타는 내가 걱정됐는지 일행을 알아봐주겠다고 까지 했다. 소영 커플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영인과의 로맨스와 더불어 나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따뜻하다. 나홀로 배낭여행이 아니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을 많이 느낀다. 그리고 이 여행이 아니었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

다음날, 나는 약속대로 기차를 타러 가기 전 짐을 꾸려 한인식당부터 들렀다. 그곳엔 이미 매니저 형님이 모아놓은 한국인 여행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고아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내 또래 여자 한 명과 30대 회사원 동기들이라는 남자 3명, 아들과 함께 배낭여행중이라는 중년의 아주머니와 그의 10대 아들까지. 다양한 인원이 모였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고아로 향하는 기차여정을 함께하는 한 팀이 되어 다함께 기차역으로 움직였다. 각자 좌석은 달랐어도 서로 오가며 짐을 봐주었고, 밤에는 다른 여행객에게 양해를 구해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자리를 바꿔 지근거리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들 덕분에 나는 또 안전하게 기차에서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기차 여기서 잠깐 정차한다니까 내가 아들이랑 가서 간식거리 좀 사가지고 올게요. 뭐 사다 줄까?”


고아로 향하는 마르가오 역까지 도착하기까지는 서너 시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아들과 함께 온 중년의 아주머니께서는 기차에서의 인연도 인연이라며 맛있는 것 먹으며 마지막 대화를 나누자며 간식을 잔뜩 사주셨다.


기차가 잠시 정차해 어수선한 틈에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화려한 인도 여성전통의상을 입은 인도인 여장남자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화장품이나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조용히 지갑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그들 손에 얹어주었다. 그들은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인도에서는 여장남자를 심심치 않게 만난다. 이들을 속된 말로 고자거지라고 부른다는데, 선천적 이유로 고자로 태어났거나, 후천적 영향으로 트랜스젠더가 되는 사람들이 이처럼 여장을 하고 구걸을 하고 다닌다고. 


이들은 제3의 성을 의미하는 ‘히즈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히즈라들은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살며, 전국을 떠돌며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도 한단다.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무서움보다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어느 덧 인도에 잘 적응한 듯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러다간 몇 시간 전처럼 누군가 몰래 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갈지도 모르기에. 


이번 기차에서도 스펙터클과 어썸, 서프라이즈, 마블 등 온갖 놀라운 단어들을 모두 경험하면서 마침내 마르가오 역에 다다랐다. 여기까지는 주언이 건네준 계획표대로다. 이제 어느 해변으로 갈지는 나의 몫이다. 내 몫만 잘 해내면 인도의 멋진 남부 해변에서 다시 주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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