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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Feb 13. 2023

인도에서 생긴 일(19)

무직이 상팔자

푸쉬카르의 석양은 아름다웠다. 작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수십 개의 가트, 그 위에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으면 그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도 황홀한 선셋이 드리운다. 언젠가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다큐에서 봤던 풍경, 스쳐지나가듯 본 장면 하나 때문에 지난 밤 무리해가며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물론 티브이 속 그 장면, 그때 그 감동만큼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 사는 작은 호수마을의 흔한 풍경 그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그 사실하나로 푸쉬카르의 석양은 티브이 속 그 장면보다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영인, 주언과 함께 새벽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온 일이 마치 꿈만 같이 느껴졌다. 새벽녘 노상방뇨 사건만 아니었어도 지금 이 시간이 열 배쯤은 더 낭만적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그들의 배려 덕분에 인도에서의 흔한 에피소드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그들이 내리길 기다리며, 혼자 도망가려 작전을 세웠지만 그들이 끝까지 날 기다려주는 바람에 얼굴이 벌게진 채로 쭈뼛거리며 버스에서 내렸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는 내게 영인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어디가지 말고 기다리라 말했다. 그리고 그 사이, 주언이 내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지금 읽지 마. 우리 가고 나면 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내용일까 너무나 궁금했다. 그 쪽지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주언이 빨리 이곳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영인이 돌아왔다.


“아, 이놈의 인도는 진짜 똥오줌 때문에 미쳐버리겠네. 인간이 이렇게 배변욕구가 강한 생물인지 여기 와서 깨달았어. 야, 주언아. 기억 나냐? 나 저번에 기차에서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서 복도 창문 열린데서 밖으로 발사했던 거? 여기는 이런 데라니까. 근데 그거 알지? 희정이도 재작년 인도 혼자 갔을 때 바라나시 가는 버스 중간에 내려서 똥 눴다던데. 걔는 그거 지금은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해.”


새벽녘 노상방뇨 사건 때문에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것인지 영인이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놨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주언도 옆에서 거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서로의 소변, 대변 에피소드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저기... 이제 그만 해도 돼. 그쯤이면 충분히 위로가 되었어. 고마워...”


그들의 배변에 관한 추억을 더 이상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같이 아침을 먹자고 제안했다. 그들에게 무언가라도 보답하고 싶어서다. 자신들의 일정까지 엎어가며 내가 위험할까봐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때문에 영인과 주언이 다시 돌아가기 전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좋지. 여기 뷔페 유명한 데 있다던데. 채식 뷔페.”


“맞아. 푸쉬카르가 채식 도시라 채식 뷔페도 유명하고, 채식 요리 진짜 맛있대. 희정이도 재작년에 와봤었는데 예상외로 너무 좋았다더라고.”


다행히도 둘은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채식 뷔페로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했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영인과 주언은 서둘러 조드푸르로 돌아갔다. 


그들과 다시 기약 없는 작별인사를 나눈 나는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푸쉬카르에 석양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주언이 건넨 쪽지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홀로 이곳의 풍경을 즐기며 고독하지만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푸쉬카르는 정말 작은 시골 촌 동네다.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릭샤도 필요 없다. 푸쉬카르는 창조의 신으로 알려진 브라흐마의 사원이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이기 때문에 엔진이 있는 이동수단이 금지되어 있어 여유롭고 조용하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앞선 이유와 마찬가지로 브라흐마 사원이 있는 성지이기 때문에 주류반입이 되지 않고 음주 또한 제한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건강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기도 하지만 그 점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호수 주변 가트에 앉아 하늘이 붉은 빛에서 완전한 검정이 될 때까지 홀로 사색을 즐겼다. 그리고 그 생각 안에는 주언의 지분도 적지 않았다. 날 이곳까지 데려다 준 것은 단지 영인의 제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걱정돼서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현 듯 주언이 건네준 쪽지가 떠올랐다. 얼른 주머니를 뒤적여봤다. 없다.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놓은 기억이 나는데, 가방은 호텔 방 안에 두고나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노점에서 야식까지 먹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쪽지 생각이 나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100m를 30초로 주파하며 호텔로 질주했다.


호텔 방 안에 도착하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가방 앞주머니부터 열어 쪽지를 꺼냈다. 쪽지는 네모반듯하게 두 번 접혀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것일까. 설마, 휴대폰 번호? 아니면 사랑한다는 고백? 찰나의 순간동안 갖은 망상을 떠올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쪽지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주언의 메시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게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는 주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오늘 밤은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음주도 금지된 도시였기에 술기운을 빌릴 수도 없어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은 생각보다 더 금세 밝아왔다. 밤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과부하가 걸려 이성적 판단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럴 땐 무조건 먹어야 한다. 입에 뭘 넣어야 머리가 돌아가기에. 


역시 먹는 생각을 하니 움직일 의욕이 생겨났다. 고민할 새 없이 얼른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은 짜이를 한 잔 마실 생각이다. 달달한 짜이 한 잔으로 입가심을 하고나면 머리가 좀 돌아가겠지. 


십여 분을 걸어 먹자골목 한편에 있는 짜이 가게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부지런한 주인덕분에 짜이 향 가득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동전 몇 개에 달달하고 따끈한 짜이 한 잔을 건네받았다. 나는 가게 앞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초점 없는 눈빛으로 짜이를 홀짝였다. 


이 시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여유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조선시대 한량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무자식 상팔자란 말은 겪어보지 못해 공감하지 못하겠으나, 무직이 상팔자란 것에 격하게 공감하는 아침을 보냈다. 이게 바로 여행의 참 맛 아닐까. 남들 학교가고 출근할 때 여행지에서 돈과 시간을 펑펑 써재끼는 것. 나는 제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 이제 쇼핑을 즐길 차례다. 푸쉬카르에는 아기자기한 상점이 많다. 대부분 가죽공예품을 파는데, 낙타가죽으로 만든 것들이다. 슥 둘러보다 그중 가장 작으면서도 물건이 꽉 들어차 있는 상점에 들어섰다. 수첩, 필통, 벨트, 목걸이, 가방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낙타가죽으로 만든 책가방 하나를 골랐다. 황토색과 갈색 어디 즈음의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다. 작은 소지품 정도 넣을 수 있는 크기에 등에 매고 다닐 수 있으니 한국에 돌아가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첩도 하나 샀다. 한국에서 가져온 다이어리가 있었지만, 따로 써야할 이야기들이 생각나서 두툼한 것으로 구입했다. 


쇼핑을 마쳤으니 이제 다시 먹을 시간이다. 노점이 늘어선 먹자골목에서 초우민이라는 이름의 야채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약간 짜장면 비슷한 비주얼이었는데 맛은 그냥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게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는 정도다. 다만, 위생은 평점에 포함하면 안 된다. 인도의 모든 노점들이 그렇듯 위장이 특별히 튼튼하지 않다면 탈이 나기 쉽다. 


그런데 나는 나의 위장을 너무 믿었나보다. 초우민을 먹고 나는 다시 델리에서처럼 심한 물갈이에 시달려야만 했다. 푸쉬카르에서의 둘째 날 저녁은 가트에서 보내는 대신 호텔 방 안 화장실에 앉아서 끝맺음해야 했다. 아쉽고도 쓸쓸한 푸쉬카르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갔다.


전날 못잔 탓에 이틀째이자 마지막 밤은 달고 깊게 잘 수 있었다. 덕분에 아침에 개운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짐부터 꾸렸다. 이제 다시 떠나야한다. 한국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온전히 혼자 여행을 즐긴 곳이 처음이었기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긴 장소여서 더 애정이 갔나보다. 


그리고 처음엔 이름도 모르던 그 남자, 주언과의 짧지만 강렬한 추억이 남은 곳이기에 떠나오기 전 몇 번이나 푸쉬카르의 정취를 곱씹었다. 이곳의 향기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낡은 버스에 다시 몸과 배낭을 싣고 아즈메르로 향했다. 그리고 아즈메르에서 다시 델리로 가야한다. 원래 내가 계획했던 일정과는 정 반대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다시 델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주언이 건넨 쪽지 때문이다. 두 번이나 네모반듯하게 접어 내게 건네준 그 쪽지 안에는 주언의 다음 여정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나는 다시 주언을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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