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왜 거기서 나와
기차는 저녁노을이 하늘을 뒤덮기 직전에 마르가오 역에 도착했다. 델리에서 고아까지 기차 메이트였던 한국인 여행객들과 간헐적 작별을 했다. 고아에 도착한 이상 어느 해변에서건 한 번은 마주하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잘 가라는 말 대신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이제부턴 다시 혼자다. 나는 가장 근처에 있던 오토릭샤를 골라 탔다. 이번엔 흥정도 하지 않았다. 설렘과 떨림을 안고 달려온 이곳은 내게 꿈속과도 같은 곳이다. 그저 아름다운 꿈만 꾸고 싶었다. 기분 좋게 릭샤에 오른 나는 꼴바 해변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릭샤 왈라는 별 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출발했다. 그런데 릭샤 왈라의 외모가 보통의 인도인과는 달라보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에 새하얀 피부, 선홍빛 눈동자까지. 순간 인도가 아닌 타국 사람인가 생각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타국까지 와서, 지금은 폐지됐지만 과거 계급으로 따지면 불가촉천민과 수드라 어디쯤에 있는 릭샤 왈라를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알비노, 즉 백색증을 타고난 사람인 듯 보였다. 일전에 델리에서도 비슷한 사이클 릭샤 왈라가 지나가던 것을 얼핏 본 적이 있었는데, 그도 아마 알비노였던 것 같다. 가뜩이나 차별이 심한 이곳에서 이들이 설 곳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금발의 릭샤 왈라는 정확히 내가 말한 꼴바 해변 호텔로 안내해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얼마를 줘야할지 몰라 하우머치만 되풀이 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Whatever.”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아무렇게나 내가 원하는 대로 주라는 것인데, 인도에서 가능한 일이었나. 주는 대로 받는다라. 그 순간 금발의 릭샤 왈라가 나의 아름다운 꿈을 지켜주는 동화 속 존재처럼 느껴졌다. 당황도 잠시, 나는 금세 행복해져 릭샤 왈라에게 보통 금액의 3~4배에 달하는 돈을 건넸다.
금발의 릭샤 왈라는 내게 God bless you라는 말을 남긴 채 오토릭샤를 몰고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렇게 꿈결 같은 고아에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마르가오 역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 중 하나란 이유로 선택했을 뿐인데, 꼴바 해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선셋이 드리울 쯤 도착해서인지, 해변에 늘어선 작은 레스토랑에서 귀에 익은 올드팝이 흘러나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꼴바 해변은 낭만이란 단어 그 자체였다.
대충 짐을 풀고 나와 어느새 어둑해진 해변가 앞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찾아간 곳은 라이브 연주도 하는 곳이었는데, 이미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모두 미소가 피어있었다. 그 모습에 내 얼굴에도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이 순간을 누군가 영상으로 담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자체로 청춘낭만 영화 한편은 뚝딱일 텐데.
해산물 파스타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밴드가 부르는 올드팝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온다. 하늘은 이미 깜깜해졌지만 해변가에 늘어선 레스토랑의 조명들 덕분에 꼴바 해변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뭐야! 맞네? 어떻게 된 거야?”
한창을 감상에 젖어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며 놀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 영인아!”
영인이었다. 그 모습에 반가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서 스르륵 내려오던 영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영인은 한술 더 떠 그런 나를 대차게 끌어안았다.
“뭐야, 너 내 스토커 아니지? 여긴 어떻게 왔어.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네.”
영인이 농담을 건넸지만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다. 영인의 스토커는 아니지만 주언의 사상팬 정도는 된 기분이었다. 물론 주언이 스케줄표를 건네주긴 했지만, 정확히 고아의 어느 해변으로 갈지는 말해주지 않았었는데, 첫날부터 이들과 마주치게 되다니. 우연의 일치라 해도 정말 운이 좋았다.
“어,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게 와있네, 내가? 근데 너 혼자야?”
그러고 보니 영인 말고는 주언이도 처음부터 동행 했다던 희정이란 여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산책 중이었지. 주언이랑 희정이, 희정이 알지? 설명했었나? 동네 불알친구라고. 암튼 걔네 둘이 데이트 좀 하라고 내가 눈치껏 자리 좀 피해주는 중이었지. 그런데 이렇게 널 만났네? 운명이야 뭐야.”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데이트라니. 주언과 희정이란 여자가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그거 주언이 의사도 확인한 거냐고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난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영인과 친하지도 않았고 주언과도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에 겨우 말을 참아냈다.
“어? 어. 그랬구나.”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싱거워? 내가 지겹냐? 잘생긴 남자와 로맨스를 꿈꾸며 남부 해변까지 왔는데 또 나라서 실망한 거 아니지?”
맞다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그 말도 겨우 참아냈다.
“실망은 무슨. 산책 중이라고 했지? 그럼 나중에” 또 보자라고 인사하고 영인을 그대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영인은 이미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뭐해, 앉아. 파스타 먹었네? 우리도 아까 파스타 먹었는데. 이 동네 음식 맛있지 않냐? 난 여태까지 도시들 중에 여기가 음식 젤 맛있는 거 같아.”
쉴새없이 떠들던 영인은 밴드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낯익은 올드팝이 흘러나왔다. 제목이 뭐였더라.
“여기서 기다릴게. Right here waiting. 리처드 막스! 맞지?”
영인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흘러나오는 노래의 제목과 가수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노래 제목 앞에 덧붙인 한 마디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닐 거다. 그저 아는 체 하기 좋아하는 영인의 성격과 나의 상황, 그리고 밴드의 노래 선곡이 맞아떨어진 것일 뿐. 그저 우연일 뿐이다. 조금 전 꼴바 해변에서 우연히 마주쳤듯이 말이다.
“우린 어제 왔는데, 넌?”
“나는 조금 전에 왔어. 근데 신기한 일이 있었어. 나 금발 오토릭샤꾼 만났잖아.”
나는 마르가오 역에서 알비노 릭샤 왈라를 만난 썰을 풀어냈다. 여행에서 겪은 것들을 바로바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씩 신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내일은 어디 갈 건데?”
영인과 나는 레스토랑을 나와 자연스레 해변을 걸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하늘은 까맸고 주변은 여전히 조명으로 반짝였다. 해변 곳곳에선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모래사장에 앉아 밤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은 일단 여기 하루 더 있을 거야. 너넨?”
“너네? 아, 주언이랑 희정이. 글쎄다. 야, 그러지 말고 내일 나랑 놀래? 걔넨 걔네끼리 놀라고 하고.”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영인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주언은 지금처럼 희정이란 이름의 동네여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텐데. 내가 계획했던 것은 이게 아닌데. 주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썸 아닌 썸을 강제로 끝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글쎄...너랑 나랑 둘이...?”
“그을쎄에에에에? 글쎄라니. 완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데. 너 나 불편해? 야 우리가 같이 다닌 시간이 얼만데. 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영인의 발작버튼을 누른 듯하다. 글쎄라는 내 대답에 영인은 순간 기분이 나빠졌는지 토라진 티를 팍팍 내며 급기야 말 더럽게 안 듣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너 진짜 서운하다. 내가 너 편하게 볼일 보라고 사막에서 어? 내가, 어? 암튼 그런 것도 배려해주고. 너 버스에서 불편할까봐 이스라엘 남자 옆에 대신 앉아서도 가주고. 또 뭐야, 너 위험할까봐 푸쉬카르 밤 버스도 같이 타줬는데. 그을쎄에에에에에? 글쎄라고? 다시 대답할 기회 줄게. 내일 나랑 놀자. 어때?”
영인의 말대로 영인은 나를 위해 참 많은 배려를 해줬다. 그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주언을 따라 이곳까지 왔는데, 주언은 다른 여자랑 시간을 보내게 놔두고 영인과 둘이 놀아야 한다니. 그것도 이렇게 낭만적인 남부 해변에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또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흔쾌한척 긍정적인 대답을 건넸다.
“아, 왜 그래. 장난이야, 장난. 그래. 놀자.”
그제야 영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치? 장난이지? 난 또 네가 고마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그런 뭐지, 파렴치한? 약간 그런 부류인줄 오해할 뻔 했어.
“파렴치한은 좀 그렇고, 몰염치 정도로만 표현해주면 어떨까 싶은데.”
우린 오랜 친구처럼 말장난으로 투닥 거리며 자연스레 해변가를 빠져나왔다.
“너 어디 호텔 묵어? 데려다 줄게. 가자.”
“뭘 데려다 줘. 바로 여기 앞이야. B호텔. 갈게. 내일보자.”
내가 묵는 B호텔 한 블록 거리에 서서 영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영인은 잠깐 주저하더니 이내 손을 흔들며 인사에 화답했다.
“우선 내일 만나면 점심부터 먹자. 12시에 호텔 앞에 서있을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간다. 잘 자.”
영인은 쿨하게 뒤돌아섰다. 나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호텔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바람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풀고 샤워를 했다. 머리카락을 털어 말리며 주언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했다. 주언은 내가 영인과 해변을 거니는 동안 희정이란 동네여자친구와 무슨 대화들을 나눴을까. 우리는 내일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고아에서의 첫날밤은 길고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