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이란 이름의 여자
낮 12시. 로비 창문 틈으로 호텔 밖을 살폈다. 약속한대로 창문 밖 호텔 입구 앞에서는 영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자이살메르 J호텔 앞에서 처음 만났던 날처럼 빨간색 모자를 쓰고.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영인이 새삼 달리 보였다.
생각해보니 영인은 처음만남부터 줄곧 나를 도와주었었다. 사막투어 일행을 구하고자 인도 여행 까페에 글을 올렸을 때도 유일하게 댓글을 남겨주었고, 불안해하는 날 위해 호텔 앞까지 와주었었다.
그뿐인가. 사막투어 준비를 위해 시장에 갈 때도 위험하다며 기어코 따라가 주었고 손수 터번도 골라 주었다. 그 후로도 틈만 나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나를 도와주던 영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B호텔 앞을 서성이는 영인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자이살메르 J호텔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막연한 고마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감정이 더해졌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아니다.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영인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왔어? 가자. 밥 먹으러.”
영인은 나를 보자마자 짧게 인사를 건네고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듯 그대로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 어. 어디 가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딘가 화난 것처럼 보이는 영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때였다.
“야, 같이 가! 그새를 못 참고 먼저 가냐.”
정확히 대각선 등 뒤 방향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언이었다.
“야! 최영인! 같이 가자고!”
그리고 뒤이어 어떤 여자가 영인의 풀네임을 부르며 소리쳤다. 거침없는 말투로 보아 아마도, 말로만 듣던 저들의 어릴 적 소꿉친구 희정이라는 여자인 것이 분명했다.
영인 혼자만 온 것이 아니었다. 영인과 주언, 희정이란 여자가 모두 내가 있는 B호텔 앞에 다다랐다.
“여행 잘하고 잘 다녔지?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주언이 영인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건넸다. 희정이란 여자는 나를 흘끗 보고는 영인을 향해 잰걸음으로 앞서나갔다.
“응. 근데 어떻게.”
주언의 등장이 너무나 반가웠지만 어찌된 일인지가 더 궁금했다. 분명 오늘은 영인과 둘이 밥을 먹기로 했었고, 주언과 희정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둘 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응? 아~ 너 어제 영인이랑 마주쳤었다며. 이상한 소리 안 해? 아무튼. 그냥 너 왔다는 거 알고 같이 밥 먹으려고 영인이 따라 나섰지. 참, 쟤는 희정이. 몇 번 말 했었지? 야! 희정아!”
주언의 말이 완벽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대충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이 자리에 스스로 찾아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언은 말끝에 희정이란 여자를 소리쳐 불러 세웠다.
“왜?”
주언의 부름에 영인을 뒤따라 걷던 희정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인사해. 얘기했었지? 빠하르간지에서 만나서 사막...”
“사막에서도 만나고 푸쉬카르도 데려다주고 뭐 그랬다며. 안녕하세요.”
희정은 주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로채 말하며 내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영인의 뒤를 쫓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도 곧바로 맞받아 인사를 했지만 희정이란 여자가 고개를 획 돌리는 바람에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일단, 가자. 배고프다. 영인이가 뭐 맛집 찾아놓은 것 같던데?”
주언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나도 그 모습에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영인과 단 둘만의 자리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주언이 내 앞에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설렜다. 희정이란 여자가 마음에 걸리긴 했어도 크게 문제삼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래? 얼마나 맛있는 집이길래.”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 영인을 따라 걸었다. 꼴바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주택가 골목을 지나자 근사한 리조트 단지가 나왔다. 그 사이 온통 푸른색으로 무장한 레스토랑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규모가 꽤 커보였다.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는 서양 사람들 몇 몇이 어깨에 수건을 두르고 맨발로 앉아 한가로이 낮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 보아 오전 해변수영을 즐길 만큼 즐긴 듯 보였다.
“우와, 여기 뭐야. 최영인~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았어?”
희정이 레스토랑을 발견하자마자 감탄하며 영인을 칭찬했다. 영인은 대꾸 없이 성큼성큼 푸른색 레스토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야외 테이블은 네 명이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실내로 들어가야 했다. 실내라고 해봐야 창문 없이 뻥 뚫린 공간에 지붕만 얹어있는 곳이어서 야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눈앞으로 고급스러운 유럽풍 리조트들이 한 눈에 들어왔고, 리조트 사이로 멀리 꼴바 해변의 고즈넉한 풍경까지 펼쳐졌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양인 휴양객들을 위한 레스토랑인 듯 했다.
“와. 여기 진짜 좋다. 여기 뭐야? 그냥 유럽인데? 너 진짜 잘 찾았다.”
“여기 주인이 유럽 사람이야. 옆에 리조트 보이지? 저기 주인이고. 몇 달씩 휴가 올 때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직접 차렸다나.”
내내 샐쭉해있던 영인이 주언과 희정의 칭찬에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어깨를 장착하곤 레스토랑 정보를 술술 읊어댔다. 가만 보면 참 단순한 녀석이다. 별 것 아닌 칭찬에 스르륵 풀리다니. 아니 어쩌면 아는 척을 하고 싶은 본능이 앞서서 자신도 모르게 풀린 것일지도. 아니, 그보다 영인은 왜 화가 났던 거지?
“너 괜찮아? 화난 거 아니었어?”
나 역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들 사이를 비집고 용기를 내어 영인에게 말을 건넸다.
“뭔 소리야. 내가 화가 왜 나. 아, 배고프다. 얼른 시키자.”
메뉴는 다양했다. 수제 햄버거와 봉골레 파스타, 게살 리조또, 해산물 야채수프, 랍스터 구이, 간단한 빵 종류와 와인, 음료, 보드카까지 해변가의 멋진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혀 인도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앉아있으니 이곳이 어딘지 조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점심식사 시간도 혼란하고 혼잡했다. 그나마 네모난 식탁이 아닌 둥그런 원형 식탁이라 견딜 수 있었다.
내 양 옆엔 주언과 영인이 그리고 그 둘 사이엔 희정이란 여자가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희정이란 여자와 나는 완벽히 마주하고 있어야 했으나, 그녀가 주언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는 바람에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하진 않았다.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일렬로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조금 걷다보니 코코넛 리어카가 보였다. 그 옆엔 각종 과일을 파는 작은 트럭과 길거리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인도 상인들은 앞 다퉈 호객행위를 하기 바빴다.
“언니, 여기야. 코코넛 마시써.”
“형님, 일리와.”
그 와중엔 나를 향해 유독 다른 언어로 말을 거는 상인도 있었다.
“니하오! 니하오!”
그 바람에 서로 어색하게 뚝딱이던 관계가 조금은 풀어졌다. 중국어로 말을 걸어준 인도 상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지 기분 나쁜 티를 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황은 나쁘지 않았기에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우린 각자 빨대 꽂은 코코넛 열매를 하나씩 들고 쭉쭉 들이키며 해변으로 향했다.
“코코넛이 이렇게 맛있는 줄 난 여기 와서 알았잖아.”
“내가 예전부터 그랬잖아. 코코넛 바로 빨대 꽂아 마시면 진짜 맛있다고.”
“그땐 내가 먹어보기 전이니 몰랐지.”
“하여간, 촌스럽게. 이래서 여행을 다녀야 한다니까. 우물 안 개구리 되기 싫으면.”
“야, 여행부심 좀 그만 부려라.”
영인과 희정이 투덕거렸다. 희정은 인도 여행만 벌써 세 번째라고 했다. 그 외에도 17개국을 돌아다녔단다. 일상이 여행이고, 여행을 삶처럼 사는 희정은 자신의 여행라이프가 꽤 자랑스러운 듯 했다. 뭐,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희정은 말끝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복대에서 여권을 꺼내어 각 나라 입국심사 도장이 찍혀있는 지면을 촤라락 펼쳐보였다.
“자, 봐라. 이게 스펙이고, 이게 경력이 되는 거야.”
희정은 그 후로도 꽤 긴 시간동안 여행예찬을 이어갔다. 단 시간 파악한 결과, 말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지만 결코 내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들 사이에 낀 불청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음. 난 숙소에 들어가서 좀 쉴게. 영인아, 덕분에 밥 맛있게 먹었어. 먼저 갈게.”
희정과 주언, 영인에게 번갈아 시선을 보내며 인사를 건넸지만 영인의 이름만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걷는 내내 희정이 나와 주언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언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그냥 이쯤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어, 그럴래? 피곤해 보이긴 하네. 알겠어. 일단 쉬어. 가!”
뒤돌아선 나의 등 뒤에서 적극적으로 인사를 해주는 이는 영인뿐이었다. 주언이 내 이름을 부르는 듯했지만 이내 희정이 말을 가로막으며 의미 없는 질문을 해댄 통에 나는 끝내 주언의 인사를 들을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간다는 핑계를 대고 그들을 등지고 반대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기다랗게 이어진 해변을 얼마나 걸었는지 신발 안은 모래로 서걱거렸다. 조금 불편했지만 털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계속 걸으며 희정이란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희정의 첫 인상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기하학적 무늬가 뒤덮인 통 넓은 바지에 자신의 사이즈보다 두 단계쯤은 커 보이는 새하얀 티셔츠, 어깨 위에 걸친 하늘거리는 빨간 스카프, 발볼이 펑퍼짐하고 얕은 단화를 착장한 그녀의 모습은 언뜻 봐도 여행고수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오는 히피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조금 무리하게 의식하며 생활하는 내 성격상 그 누구도 아는 이 없는 인도에서도 과감하게 변신 하지 못했다. 그저 단출하게 싸온 짐 안에서 빨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내 취향을 고수했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여행이니 차려입지 않고 단정한 느낌 정도로만 다니지만, 한국에서의 일상은 어느 정도 차려입은 느낌이 들지 않으면 동네 마트 가는 것도 주저할 때가 많았다.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 집중하며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마음을 표현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상대방의 의중을 더 중히 여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왔다. 어쩌면 이번 인도 여행이 처음일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사실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말 자체도 민망할 정도로 그저 주언의 발걸음을 쫓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희정은 나와 확연히 달랐다. 마음껏 표현하고 대놓고 질투하고, 적극적으로 주언의 옆자리를 지켰다. 반면 나는 그들 사이에서 불편한 존재가 될 까봐 또 다시 한 발짝 물러섰다. 주언을 향한 마음보다 희정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기분이 한 없이 땅으로 꺼졌다.
나는 그녀가 미친 듯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