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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Apr 10. 2023

인도에서 생긴 일(24)

지금 하고 싶은 일

운 좋게도 아람볼 해변에서 잡은 숙소는 여태껏 여행을 하며 묵었던 숙소들 중에서 가장 멋지고 근사한 곳이었다. 해변과 1km가량 떨어진 곳에 작은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작은 숲 속 안에는 동그란 중앙정원을 중심으로 7개의 방이 빙 둘러져 있었다. 


방문 옆으로는 테이크아웃 카페처럼 큰 창이 나있고, 창턱에는 테이블처럼 쓸 수 있는 나무판이 덧대어져 있어서 그곳에 콜라 한 병을 올려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에 적격이었다. 


방안도 훌륭했다. 원룸 형태의 작은 방이었지만 알록달록한 모포가 방석처럼 올려져 있는 1인용 대나무소파와 새하얀 이불이 깔려있는 앉은뱅이 침대는 묘한 안정감을 줬다. 대충 못을 박아서 만들어놓은 듯한 미니 테이블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밤을 보낸 것인지 갈색 나무 테이블 위에는 형형색색의 촛농들이 문신처럼 늘어 붙어있었다.


나는 7개의 방 중 입구에서 가장 멀찍이 떨어진 4번째 방에 묵게 됐다. 오른쪽 방에는 히피스타일의 연인이 일주일째 묵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왼 쪽방엔 러시아에서 놀러 온 가족들이 묵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바닐라다. 


사실 바닐라의 이름이 진짜 바닐라인지는 확실하진 않다. 동그란 눈과 통통한 볼이 매력적인 그녀는 이제 막 세 살이 된 러시아 아기다.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아직 완벽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렴 어떤가. 바닐라든 스트로베리든 심신이 지쳐있던 내게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행복을 안겨준 고마운 존재임은 분명했다.


창문을 한껏 열고 콜라를 마시며 창밖의 숲 속 풍경을 즐기고 있던 나른한 오후, 옆방에서 바닐라가 내게 싱긋 인사를 건넸다. 낯선 외국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눈짓으로 무언의 오케이 사인을 건네자마자 3등신 몸매로 뒤뚱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바닐라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었다. 나는 양팔을 한껏 벌려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후로 러시아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을 찾아온다. 그리고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내 휴대폰도 뒤적이고 여행책자와 옷가지도 들춰보며 배시시 미소 짓곤 했다. 그녀의 애교만점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나는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처음으로 인도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됐다.



아람볼에서의 이튿날. 오전 일찍 바닐라가 가족들과 물놀이 가는 것을 배웅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먼저 내 계획은 밀짚모자를 사는 것이다. 해가 너무 뜨거운 탓에 모자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예쁜 원피스도 하나 살 생각이었다. 


여태껏 입고 다닌 것은 한국에서 싸 온 옷가지가 다였다. 매캐한 인도의 매연 탓에 매일 옷을 빨아 입었음에도 때가 더 이상 잘 빠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옷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를 지경에 이르자 옷을 사 입을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왕 사는 거 조금 비싸더라도 마음에 쏙 들게 예쁜 옷을 사리라 생각했다.


아람볼은 여느 해변처럼 기념품숍과 소품숍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옷가게를 찾는 것은 수월했다. 문제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화려한 옷들 중 어떤 걸 고르느냐는 것이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사계절 내내 무채색 인간으로 살아왔던 나는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인도 남부 해변 패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쁘다. 여기 여기.”


내가 한참이나 가게 앞을 서성이자 인도인 여자 직원이 쓱 나타나 내게 원피스 하나를 건넸다. 그 사이 점원이 내 눈빛을 읽은 듯했다.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차마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아 눈으로만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초록색 원피스다. 


초록색 원피스라니. 내가 입으면 개구리 왕눈이 여친 아로미 같지 않을까.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북방계 한국인의 눈을 갖고 있기에 왕방울만 한 눈을 가진 아로미로 오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피스는 한국에서도 입는 옷이긴 하지만, 그마저도 트레이닝복처럼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어두운 색상의 스타일만 고수했던 터이기에 라인이 들어간 싱그러운 초록빛 원피스를 입는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긴 했다.


점원은 내 눈빛을 또 읽었는지 그대로 원피스를 내 품에 던지듯 안겨주더니 챙이 넓은 모자 하나도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모자에는 원피스와 같은 색상이 커다란 초록색 리본이 둘러져 있었다. 이럴 수가. 예쁘긴 하다만 대체 이걸 어떻게 쓰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번뜩 들어 손사래를 치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날 본다고. 아니, 예쁘긴 하잖아. 여기서만큼은 누구 눈치 보지 말자. 내 마음 편하자고 몰래 도망치듯 아람볼로 와놓고 여기서도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초록색 원피스와 초록색 왕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샀다. 


점원은 돈을 건네받은 뒤, 커다란 봉투에 옷과 모자를 싸주었다. 당장이라도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하기에 온종일 옷 봉지를 털레털레 흔들며 아람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직 과감히 옷을 갈아입진 못했지만 그동안 사본 적 없던 옷을 산 것만으로도 커다란 미션을 성공이라도 한 듯 하루 종일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상점가는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모두 나처럼 즐거워 보였다. 여행의 힘이겠지. 다들 일할 때 한가로이 놀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행복해지는 여행의 힘. 사람 사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길거리 헤어숍도 눈에 들어왔다. 히피스타일로 색색깔 실을 교차로 땋아 레게 머리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어떤 장발의 동양남자는 하얀색 실을 넣어 머리를 땋고 있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거울을 슬쩍 비춰보며 씩 웃어 보였다. 


다음 블록에 자리한 헤어숍에서는 긴 머리의 서양여자가 빨간색 실을 엮어 레게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예뻤기 때문일까. 너무 잘 어울리는 예쁜 모습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내 돌아섰다. 초록 원피스도 감당 불가한데 레게머리라니. 쿨하게 뒤돌아 거리 곳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는 중간중간 한국 사람들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그중엔 고아행 기차에 함께 올랐던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너무 반갑다! 고아가 좁은 곳이라 한 번은 마주칠 줄 알았는데. 아람볼에서 만나네요.”


10대 아들과 여행 중인 중년의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특히 화려한 모자가 너무나 잘 어울려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엇, 누나! 누나, 제발 우리 엄마 좀 말려주세요. 모자 누나가 뺏어줘요!”


한창 예민할 시기인 10대 중후반의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엄마의 모자를 가져가 달라 애원했다. 중년의 여인의 머리에 살포시 씌어있는 밀짚모자에는 내 모자에 달린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한 땡땡이 무늬의 왕 리본이 달려있었다. 


“야, 내 돈으로 내가 산거거든. 냅둬. 나는 니가 신고 싶은 신발 내가 철마다 사주잖아. 정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돈 벌어서 니 마음에 드는 모자로 바꿔주던가. 이번 거는 내돈내산이니까 건들지 말자, 아들?”


사이좋은 모자지간은 모자 가지고 한동안 티격태격 거렸다. 그 모습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득 한국에 있는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나처럼 무채색 옷을 즐겨 입고,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매번 주변을 살피는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여행을 즐기지 못한 채 엄마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엄마를 데리고 어디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 차 한 잔 마실까요? 시간 길게 안 뺐어. 괜찮아요?”


중년의 여인은 기차에서 느꼈던 대로 배려심이 넘쳤다. 그냥 차 한 잔 하자 편하게 말해도 될 텐데, 내심 시간을 뺏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나 보다.


“시간을 뺏긴요. 저는 너무 좋은데요.”


모자지간과 나는 또다시 잠깐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잠시 노점에 앉아 함께 차 한 잔을 마시며 인도에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모자요. 너무 멋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모자 같은데요.”


내가 불쑥 모자가 멋지다고 칭찬의 인사를 건네자 중년의 여인이 활짝 핀 꽃보다 더 활짝 웃으며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쵸? 어머, 그 영화 아는구나. 정말 오래된 고전인데. 이 모자 스칼렛이 썼던 모자랑 비슷해서 샀거든. 그렇다고 내가 비비안 리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젊을 때 못해봤던 게 눈에 밟히더라고. 나처럼 다 늙어서 하지 말고 뭐든 당장 해보고 싶을 때 해봐요. 나이 들어서 황소만 한 아들 키우면서 하려니 눈치가 보여서 원.”


말끝에 중년의 여인은 주책없는 아줌마처럼 깔깔거리며 웃으면서도 눈동자는 열여덟 소녀처럼 수줍게 반짝였다.


“참, 여기서 랍스터 배 터지게 먹어야 하는 거 알죠? 해변 끝 쪽에 있는 T레스토랑이 분위기도 좋고, 랍스터 요리도 잘하니까 랍스터 예약할 거면 T레스토랑에다 해요.”


아람볼을 포함하여 고아해변에서는 랍스터, 새우 등 한국에서는 비싸서 몸 사리며 먹었던 해산물들을 싼 가격에 실컷 먹을 수 있다. 그중 랍스터는 미리 전날이나 당일 한낮에 예약해야 저녁에 대기 없이 원하는 만큼 맛볼 수 있다. 


“아, 그래요? 이따 바로 가서 예약해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먹는 얘기, 여행 얘기, 사는 얘기 등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얕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엄마, 이제 가자. 누나도 혼자 시간 보내야지. 누나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봐요.”


“그래. 잘 가. 엄마 잘 챙겨드리고.”


잠시 후, 아들의 재촉 아닌 재촉에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너와 나로 분리되어 각자 갈 길을 향해 걸었다.



인도에서 만난 인연들과는 종종 우리가 되곤 했다. 주언과도 그랬다. 그의 생각을 곱씹지 않으려 애썼으나, 모자지간이 유쾌하게 휩쓸고 간 자리에는 쓸쓸함이 한 움큼 남아 절로 그가 떠올랐다. 첫날 내가 몰래 떠난 것을 알고 조금은 황당해했을까. 이튿날인 오늘은 평범한 어느 날처럼 즐겁게 여행을 즐기고 있으려나.


이제 내 옆엔 그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 숙소로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인간이 얼마나 느리게 걸을 수 있는지 기네스북에 참가한 도전자처럼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해변 레스토랑을 향해 어깆어깆 걸어갔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활활 타오를 때쯤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추천해 준 T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녁 7시 랍스터 두 마리와 해산물 파스타를 예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낮 해가 너무 뜨거웠기에 잠시 누워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가에 기대어 앉아 한참이나 숲 속 정원을 바라봤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기분 좋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그때 문득 중년의 여인의 말이 바람과 함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든 당장 해보고 싶을 때 해봐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그 길로 벌떡 일어나 아까 걸었던 상점가 골목으로 향했다. 상점가 골목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 위해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마침내 도착한 상점가 골목 앞, 나는 잠시 손으로 무릎을 받치고 엎드려 숨을 한 번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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