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르던 사이
아람볼로 향하는 버스는 휘황찬란했다. 알록달록한 꽃무늬 장식이 버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버스 맨 앞 천장 고리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은혜로운 느낌이 충만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CCM이 흘러나왔다. 한껏 열린 창문 사이로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십자가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사뿐사뿐 흔들렸다.
인도 인구 중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지만, 고아주는 조금 다르다. 고아주는 주민의 상당수가 가톨릭 교인이다. 과거 포르투갈이 이곳을 오래도록 점령하면서 힌두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포교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아픈 과거지만 인도의 역사에 무지한 제3 국의 외국인의 시선으로는 찬양가가 흘러나오는 인도의 버스 풍경이 색다르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마 인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자유로운 분위기가 한껏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인도인 승객은 얼마 되지 않았다. 레게머리를 하거나 긴 파마머리를 늘어트리고 헐렁한 고무줄 바지에 민소매차림을 한 히피족 느낌의 방랑자들의 비중이 제일 높았다. 그리고 나 같은 동양인 여행객이나 피부가 붉게 그을린 서양인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아람볼로 향하는 버스 안 풍광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저마다 색채가 다른 사람들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창밖을 내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연신 서로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정열의 연인도 있는가 하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꿋꿋이 독서를 이어가는 노년의 청춘도 있었다.
나는 오래된 인도여행 탓에 몰골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으나, 마음만은 가장 편안한 상태였으므로 캐러멜을 오물거리며 자유로운 이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러나 아무리 휴양지에 한낮일지라도 인도에서 여자 혼자 버스를 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므로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미리 정열의 연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옆 자리를 사수했다. 그들도 인도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사소한 사건사고 하나 없이 여유롭고 행복한 그 기분 그대로 아람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람볼 해변의 고운 모래가 발바닥을 사르륵 간질였다. 해변 곳곳엔 하얀 소들이 모래를 침대 삼아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를 한껏 땋고 팔찌를 주렁주렁 찬 방랑객은 그들 옆에 자신도 소인 양 들어 누워 있었다. 평온한 풍경에 어느새 조금 남아있던 잡생각마저 멀리 수평선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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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바 해변을 떠나 아람볼행 버스를 타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밤 희정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였다. 간밤에 숙소로 들어가던 중 내가 묵고 있는 B호텔 앞에서 주언과 영인, 그리고 희정을 마주쳤었다. 어디서 갑자기 빌려 타고 왔는지 하얀 스쿠터 두 대를 나눠 타고서 B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냥 모른 척 숙소에 들어가고 싶었다. 주언이 운전하는 스쿠터 뒤에는 희정이란 이름의 여자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뭐야 방에서 쉬는 거 아니었어?”
영인이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 나를 불러 세웠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대강 대꾸를 한 뒤 뒤돌아서는데 이번엔 희정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맥주 한 잔 하면 좋겠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내내 나를 경계하는 줄만 알았던 희정이 내게 먼저 맥주를 마시자고 제안하다니. 희정의 말에 주언도 배시시 웃으며 함께 맥주를 사러 가잔다. 제법 큰 마켓까지는 걸어서 이동하기에 무리가 있어 스쿠터를 대여했다고.
실제로 고아의 해변마을에서는 많은 여행객들이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닌다. 렌트숍이 따로 있어서 외국인들도 쉽게 빌릴 수 있다. 나는 운전은커녕 자전거도 타지 못했기에 이들과 헤어진 후, 그냥 뚜벅이로 두어 시간쯤을 돌아다녔었다.
“야, 타!”
영인의 몸에 X세대 오렌지족이라도 빙의한 것일까. 언제 적 야타인지. 내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영인이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나를 재촉했다. 촌스러운 야타도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도 썩 내키진 않았지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못 이기는 척 영인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거 하고.”
영인은 한쪽 핸들에 걸쳐있던 헬멧을 쓱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자신은 이미 헬멧을 쓰고 있음에도 여분의 헬멧을 하나 더 빌린 것이다. 흘끗 돌아보니 주언도 희정도 모두 헬멧을 쓴 상태였다.
“고마워.”
이전 같았다면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캐물었을 텐데, 영인에게도 왠지 벽이 느껴져서 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잡아. 대충 잡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 너. 됐지? 자, 출발한다.”
그렇게 우린 스쿠터를 타고 마켓으로 향했다. 마켓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없는 것 없이 수많은 종류의 물품들이 그득했다. 과자 몇 개와 맥주를 잔뜩 샀다. 좀 전까진 분명 내키지 않는 불편한 술자리였는데, 문득 푸쉬카르에서 맥주 없이 그림 같은 선셋을 바라보며 침을 흘렸던 것이 떠올라 부지런히 맥주를 골라 담았다. 가끔은 내가 단순한 인간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처럼.
마켓에서 나와 맥주를 스쿠터 뒤 칸에 싣고 다시 꼴바 해변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도 희정은 자연스레 주언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별 수 있나. 나 역시 영인의 뒷자리에 앉아 어색하게 허리춤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내내 따스한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매만지며 스쳐 지나갔다.
꼴바 해변이 점점 가까워질 때쯤 기막힌 타이밍에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내 앞에 보이는 등짝이 주언이 아닌 영인의 등짝인 것이 사무치게 아쉬운 순간이었다.
꼴바 해변에 도착해서 스쿠터를 반납했다. 우리는 각자 한 손에 과자와 맥주 봉다리를 들고 말없이 노을 진 해변을 걸었다. 별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 순간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 뒤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맥주마실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저기 자리 좋다. 조용하고 운치 있네. 저기 앉아서 마시자.”
우리는 해변에서 좀 떨어져 있는 야자수가 잔뜩 우거진 숲 속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가운데 테이블이 달려있고 양옆으로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벤치였다.
다들 말없이 부지런히 과자봉지를 까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각자 맥주 한 병씩 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앞엔 주언이 내 옆엔 영인이 있었다. 희정은 대각선에서 혼자 말없이 먼저 맥주를 들이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잔 해, 들.”
왜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영인이 참다못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진짜 이것도 인연이다. 동네 코찔찔이들이랑 인도에 같이 오다니. 그리고 너까지 만나서 이렇게 넷이 둘러앉아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아무튼 짠.”
주언이 말을 받아 고해성사 같은 건배사 비슷한 말을 외치며 짠을 제안했다. 나는 말없이 맥주를 들어 주언의 짠에 응했다. 분명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각선에 앉은 희정이 흘끗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어서 주언을 향해 맥주병을 부딪치며 무심히 말을 던졌다.
“많이 친해졌나 봐. 이쪽분이랑.”
“어? 어. 그치. 우연히 자주 마주치다 보니. 나이도 우리랑 같고.”
주언의 말에 갑자기 희정이 발끈했다.
“야, 난 2월생이야. 엄연히 따지자면 내가 니들 누나지. 심지어 최영인 쟤는 나랑 1년 차이나.”
“하, 또 나왔다. 여행부심이어서 나이부심. 그래서 뭐 얘한테 언니소리라도 듣고 싶은 거야 뭐야. 내가 대신 불러줄게. 희정온닝”
“어우. 진짜 싫다. 니가 진짜 내 동생이었음 넌 뒤통수 벌써 절벽 됐어. 나한테 하도 맞아서.”
“넌 이미 절벽... 아, 아니 이건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발언이니 그만 말하겠어.”
영인이 장난스럽게 희정의 말을 되받아쳤다. 근데, 가만히 있는 내 머리채는 왜 잡고 희정이 앞에 흔드니. 맥주도 좋다만, 이 자리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기에 영인의 농담에도 웃을 수 없었다.
“아, 너는 이 상황이 뭔지 모르겠다. 이거 분기별로 잊을만하면 꺼내는 희정이 레퍼토리야. 빠른 생일자만 할 수 있는 갈굼 뭐 그런 거. 근데 넌 생일이 언제야?”
주언이 영인과 희정의 티키타카에 혼자 큭큭 거리다 내게도 생일이 언제냐 물어왔다.
“난 여름에 태어났어. 젤 더울 때. 넌?”
“아 그래? 나도 여름에 태어났는데.”
“주언이는 생일이 거의 중복이랑 겹쳐서 우린 얘 생일 때마다 삼계탕 엄청 먹었다, 그치?”
내 생일은 중복 즈음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희정이 말을 가로챘다. 주언이의 생일도 중복 즈음이라니. 어쩌면 같은 날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주언에게서 운명의 향기가 나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나도 그즈음 생일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희정의 앞이라 그랬는지 자꾸 움츠러들어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어느덧 술자리가 무르익었고, 술기운 탓인지 나도 희정이란 이름의 여자도 서로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었다. 한결 편안한 분위기가 되자 내내 여자 둘의 표정을 살피던 영인이 조금 안심이 된 모양인지 그제야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움찔거리는 표정을 보아 짐작하건대 꽤 오래 참은 듯했다.
“야, 나 화장실!!!”
“어, 나도.”
주언도 영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잠시 희정이란 이름의 여자와 단 둘이 자리에 남게 됐다. 조금은 편안해진 분위기라 생각했는데, 그 둘이 빠지자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다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진작 들어가서 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색한 침묵 끝에 희정이 내게 건넨 말이다. 그 말속엔 많은 뜻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불편하냐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 아까? 어... 그냥 혼자 산책 좀 하고 싶어서..."
그녀가 존댓말인 듯 아닌 듯 애매하게 말을 맺었다. 이것 또한 빠른 생일자의 고집 같은 것이려나. 중복 즈음 태어났지만, 괜히 지기 싫은 마음에 말끝머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조금 불편했을 거 같아. 생각해 보니 내가 좀 그랬던 것 같아서..."
희정이 또다시 애매하게 끝마디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좀 그랬던 것 같다니. 뭘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불편하긴. 내가 낯을 가려서..."
먼저 존댓말 안 하기, 혹은 말 놓자고 먼저 말하지 않기 배틀이라도 붙은 듯 그녀와 나는 말끝을 흐지부지 흩트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네댓 번 핑퐁대화를 이어가던 중, 결국 내가 이 유치한 싸움의 승리자가 되었다.
"휴, 그냥 편하게 말할게. 우리 동갑이니까 말 놓자? 괜히 더 불편해지는 것 같아서."
하루가 지나 생각해 보니, 그녀가 승리자라는 생각도 든다. 잠시 엇나간 듯 보였지만 희정이란 여자는 내가 느꼈던 첫인상 그대로 쿨하고 멋진 성격이었다.
"그래도 되나... 그게 편하면, 그래. 그러자."
서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한 후 대화는 한층 자연스러워졌고, 대화를 얼마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지극히 사적인 얘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희정은 잠시 주춤하다 숨까지 크게 들이쉬며 조심스레 질문 하나를 건넸다.
"음, 이런 질문 어떨지 모르겠지만. 혹시 말이야. 주언이 어떻게 생각해? 그냥 정말 단순히 궁금해서. 매번 우연히 마주친 것만 같진 않아서 말이야."
희정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이전까진 생전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남녀가 타국에서 그것도 어마어마한 면적의 나라에서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몇 번이고 마주친다는 게 우연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임은 분명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사실 내가 주언이를 오랫동안 좋아했어. 이번 인도여행도 얘네 둘만 오기로 했던 건데 내가 우겨서 무리하게 따라온 거야. 고백이라도 해보려고. 그래서 일정 중간중간 갈라졌었던 거고. 근데 각자 여행했다가 다시 만날 때마다 뭔지 모를 어려운 벽이 하나씩 늘어나는 기분이 들더라고. 혹시 그 벽이 너인가 싶어서..."
갑작스레 훅 들어온 그녀의 고백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순간 후회했다. 나는 왜 그녀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나도 껴달라고. 데려가 달라고. 그 편이 더 담백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순간의 깨달음 뒤에 몰려오는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아, 그랬구나. 내가 신경 쓰일 수 있었겠다. 미안."
왜인지 모르게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고작 여행지에서 느낀 얄팍한 설렘으로 누군가의 참사랑을 갈라놓을 뻔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냥 그 순간은 미안하단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니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무례했지.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이제 열흘 후면 한국에 돌아가야 하거든. 나도, 주언이도. 그리고 내가 듣기론 너도. 맞지?”
“어? 어. 일정이 비슷하더라고. 근데 주언이한테 말한 적은 없는데, 한국 가는 일정.”
“최영인이 알고 있던데. 니 일정.”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 영인과 단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말한 기억이 났다. 비행 편과 시간 모두 달랐지만 같은 날짜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신기했었다. 물론, 우리 외에도 쏘영 커플 역시 돌아가는 날짜가 같았기에 그렇게까지 기가 막히게 소름 끼칠 정도의 우연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어. 사실 이 얘기하려고 아까 호텔 앞에서 맥주 마시자고 말 건 거야.”
희정은 생각보다 더 솔직하고 쿨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장애물이라 생각되는 것에 정면으로 돌진하는 것도. 나는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아, 나는 어차피 내일 아람볼로 가려고 했어. 나 신경 쓰지 말고 잘해봐.”
“갑자기? 설마, 나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 걔들이 서운해할 텐데.”
“서운해 하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원래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서 현실로 복귀하면 아무것도 아닐… 어, 온다. 암튼 잘해봐.”
희정이 내 말 끝에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영인과 주언이 점점 가까워오자 이내 표정을 바꾸고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후로도 우리는 밤이 깊을 때까지 맥주를 안주삼아 각자의 이야기를 나눠마셨다. 시간이 깊어갈수록 주언을 향한 내적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멀어지려 애썼다. 희정과 나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겠지만, 의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지만 주언을 향한 마음의 깊이가 나보다 훨씬 깊어 보였기에 그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마지막 맥주병을 비워내고 술자리가 마무리됐다. 나와 그들의 숙소는 반대방향이었기에 데려다준다는 그들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고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느껴졌다. 분명 온도는 포근했지만 바람 때문에 야자수 잎이 펄럭이는 소리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호텔 방에 들어와서도 야자수 잎 펄럭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영인과 주언, 그리고 희정이 같이 밥을 먹자며 호텔 앞으로 찾아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함께 했다. 전날 점심때처럼 자연스레 코코넛 음료도 하나씩 나눠 마셨다. 의미 없는 대화도 하하 호호 즐겁게 나눴다.
이따금씩 희정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주언이 내게 말을 건네자 이내 주언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정오 즈음 되어 햇살이 타는 듯 뜨거워지자 각자 쉬기로 하고 숙소에 돌아온 후, 바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람볼 해변에 홀로 서있다. 외로울 만큼 고요한 바닷바람을 맞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