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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핫수진 Oct 22. 2023

이것은 성인 동화 실현기

일과 여행의 아찔한 동거



 성인의 동화란 특별할 것이 없다. 녹음이 우거진 풀숲이나 말하는 개구리는 물론, 비단 옷을 걸친 왕자도 필요없다. 더이상 유리 구두를 신고 왈츠인지 브루스인지 모를 춤사위로 끝나는 앤딩(Ending)엔 관심이 없단 말이다. 그저 한가지 해피앤딩을 꿈꾼다.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는 일과 함께 했습니다.


 약간의 욕심을 덧붙이자면 그 앤딩이 조금 더 극적으로 찾아오길 소망할 뿐이다. '(내가 원하는)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는 일과(만) 함께 했습니다' 정도로.


 나 역시 그런 평범한 어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성인다운 꿈을 꾸며, 성인다운 밥벌이를 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아버지의 권유로 임종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사랑과 용서를 구하고, 누군가는 남은 이들에게 애절한 부탁 한마디를 남겼다. (그날 아빠가 남긴 자필 유서는 진짜 유서가 되고 말았다.)


 나는 나를 원망했다. 사는 동안 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지, 하지 못했는지. 노란 수의을 입은 채 관뚜껑을 덮고 누운 시간이 꽤나 강렬했나 보다. 한동안 선 잠에서 조차 꿈속의 나는 나를 원망했다.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것을 지금 하지 않을 이유는 그 무엇도 없다고. 그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니냐고.

 

 그러다 문득 연례행사처럼 작성한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달성한 것을 제하는 것 보단 새로운(내년이면 사라지겠으나 올해에는 달성하고 싶은) 것을 채우는 데 몰두한 목록이었다. 남아있는 6년간의 목록들을 출력해 책상 위에 줄세웠다. 서로 다른 목록을 모아보면 백 개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매년 top 3에 빠지지 않는 네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위한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미래의 나에 대한 가증스럽게 돈독한 믿음만으로 번복되고 있었다.


세계일주


 우습게도 난 죽고 싶단 충동이 들 때면 '세계일주는 하고 죽어야지'란 마음으로 생의 발꿈치를 붙들었다. 그것이 생의 이유라면 삶의 의지를 잃은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닐까. 엄마 몰래 거대한 가방을 침대 밑에 숨겨놓고 숨이 틀어막힐 때마다 꺼내봤다. 170cm에 달하는 길다란 내 몸도, 억 소리나는 사업자금이 오고가는 내 삶도 한 품에 담길 것만 같았다. 아니, 잽싸게 담아 뚜껑을 채워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떠났다. 일과 여행을, 현실과 이상을 양 손에 쥐고 지구에서 지구로 향했다.








 




 한동안 마음을 붙이고 머물던 도시를 떠나는 일은, 익숙한 손길로 밀도있게 배낭을 채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머무는 여행자의 꼴은 달팽이를 닮았다.

 가장 안 쪽에는 잠옷 겸 외출복인 옷가지를 돌돌 말아 채운다. 그 위에 김과 라면을 적절한 힘으로 눌러담은 후 바짝 마른 수건으로 감싼 라면포트를 싵는다. 가장 위에는 새 도시에 도착할 때쯤 꺼낼 수 있도록 화장품과 손때 뭍은 겉옷을 챙긴다. 마지막으로 등과 맞닿는 부분에 노트북과 충전기를 찔러넣은 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지퍼와 지퍼 사이 옷핀을 채운다.


 거울 앞에 서서 메어본다. 윽! 짧은 외침와 함께 등이 15도 가량 굽는다. 다음 번엔 기필코 나들이 가방 하나만 들고 오리라. '혹시나' 병에 걸린 내겐 절대 불가능한 다짐을 해본다. 거울 앞에 꼴이 영락없이 집 지고 다니는 달팽이를 닮았다.


 내가 실현하는 성인 동화의 주인공은 등 뒤에 침실과 주방, 사무실, 화장실마저 이고 다니는 '달팽이'다. 비록 화려한 드레스와 두둑한 지갑을 지닌 왕자님은 없지만, 나를 담은 일(Work)이 있고 온전히 머무는 여행(Vacation)이 있다.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두가지를 이고 지고 떠나는 아찔한 동거.

 그 지구 정복기에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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