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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17. 2020

산에 나물 하러 갈래?

“오후에 홑잎나물 뜯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웃마을 사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보자기와 장갑, 물병을 배낭에 넣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H네 집으로 향했다. 산에 간다는 생각에 페달 돌리는 두 다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때를 놓치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딱 그 시기, 그 자리에 가야만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 다시 보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 그러니 지금 당장 가서 만나야만 하는 것들. 어쩌면 나물 채취는 핑계일지 모른다. 한껏 마법을 부리는 봄 숲을 마중하러 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으니까.

숲이 선사하는 의식 같은 연례행사,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 맛보는 봄의 맛. 초록의 맛.

바로 나물 산행이다.


 오미자와 토마토, 고추 농사를 하는 H는 나의 시골 살림 선배다. 농사와 시골 살림 전반에 관한 내 초짜 같은 질문에 척척 대답해준다. 때를 알고 함께 가자 말해주는 친구가 있기에 가능한 나물 산행이다. 숲에 들어서면 발밑에 돋아난 나물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준다. 몇 년 따라다니다 보니 까막눈인 나도 보는 눈이 생겼다. H네 오미자 밭을 지나 마른 관목 수풀을 헤치고 들어서니 연초록 세상이 펼쳐졌다. 화살나무 가지에 돋아난 작고 여린 새순, 진달래 질 때쯤 화살나무에 연둣빛 홑잎이 돋아난다. 홑잎을 손으로 훑으며 허리춤에 묶은 분홍 보자기에 담는다. 옆에서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두둑해진 보자기를 배낭에 넣고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물가로 가보았다. 신발을 벗고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4월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계곡물이 차다. 온몸이 저릿한 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갛게 헹궈지는 기분이다.

 뜯어온 나물을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 소금물에 살짝 데친 다음 들기름과 액젓을 넣어 무쳤다. 보드랍고 연한 봄의 맛. 말랑말랑한 아가 속살에 얼굴을 부비는 맛. 일 년에 한 번 맛보는 귀한 맛이다.




“지금 나물 하러 산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이번엔 아랫집 언니의 전화다. 이 날은 마침 아이들 소풍 가는 날이라 김밥 싸고 남은 걸 모조리 도시락에 담고, 전날 담근 돌나물 물김치도 배낭에 담았다. 늑골 사는 S 한테도 전화를 걸었다. 셋이 대야산 입구까지 살랑살랑 걸어갔다. 산벚 꽃잎 동동 떠내려가는 계곡을 건너 숲에 들어섰다. 계획 없이 함께 훌쩍 떠날 수 있는 이웃이 곁에 있고, 언제든 우릴 맞아줄 산과 계곡이 지척에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를 가진 아랫집 언니는 산더덕과 산도라지 채취의 달인이다. 야생 더덕과 도라지로 조청과 막걸리를 빚는다. 나보다 키가 십삼 센티나 작아서인지 발밑에 있는 것을 잘 본다. 반면 선주는 언니가 알려준 나물을 바로 알아채고 금방 찾아낸다.

 “거기 있잖아. 네 오른쪽 바로 옆에!”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찾아냈다. 돌돌 말린 작은 손을 쭉 뻗고 있는 귀여운 모양. ‘톡’ 하고 가볍게 꺾이는, 바로 고사리다. 내가 늘 젬병이다. 방금 가르쳐 준 것도 잘 못 찾아낸다.가까이 있는 나물도 늘 지나친다.


 “우린 언니보다 키가 작아서 그래. 대신 언니는 우리가 못 보는 풍경을 보게 해 주자나.” 실은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들은 따로 있다. 연둣빛 이파리를 통과한 태양의 광선이라든가, 은빛으로 빛나는 할미꽃의 보송보송한 솜털, 수줍게 피어있는 각시붓꽃. 물에 떠내려가는 꽃잎의 움직임 같은 것들. 나는 그런 풍경에 더 눈길이 간다. 여럿이 가니까 내가 미처 못 보는 것을 보게 된다. 숲이 훨씬 풍성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잔대, 둥굴레, 신경풀, 우산나물, 땅두릅, 참두릅, 다래순, 곰취, 수리취, 고사리...

이름만 불러도 입 안에 초록이 가득 고인다. 계곡 너른 바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김밥을 먹었다.

 “물소리 들으니까 머리가 맑아지지 않니?” 아랫집 언니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 서야 물소리를 인식했다. 그러고 보니 물소리와 온갖 새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콸콸콸, 쫠쫠쫠, 퀄퀄퀄~ 언니,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S가 말했다. “얘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흘렀을까?” 우린 한 마디씩 툭 던지고 오랫동안 말없이 김밥을 먹었다. 각자 자연과 깊은 교감에 빠져 든 것이리라. 마을로 내려오는 길. 아그배나무에 핀 꽃들로 주변이 화사하다. 계곡물에 발을 씻고 났더니 몸도 마음도 상쾌해졌다.



  “산에 나물 하러 갈래?” 


 이 말은 연애할 때 나를 달뜨게 했던 그 어떤 밀어(密語)보다도 나를 설레게 하는 말이다. 오월 나물 산행은 내가 먼저 가자고 전화해야겠다. 작년에 봤던 쪽동백나무 꽃과 으아리 꽃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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