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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13. 2020

우리 아빠는 목수님이다!


“엄마, 나 아빠 일하는데 갔다 올게.” 

“거긴 왜?” 

“일요일인데도 아빠는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잖아. 아빠 심심해할까 봐.” 

큰 딸아이가 동생 손을 꼭 잡고 뛰어가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인다. 아이들은 아빠의 작업현장에 설치된 하얀 텐트 안으로 사라진다. 다음 장면은 안 봐도 비디오다. 자매는 지금 저 텐트 안에 있는 작은 냉장고를 털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빠가 일할 때 먹는 과자와 음료수가 가득 들어있는 저 보물 상자를 틈만 나면 노리는 아이들. 몇 분 뒤 둘 다 흡족해진 표정으로 캔 사이다 하나씩 홀짝거리며 돌아오고 있다. 왼손에는 과자도 하나씩 들려있다.  


남편은 집 짓는 목수다. 시골에 오기 1년 전, 남편은 한옥학교에 다니며 목수 일을 배웠고, 결혼과 동시에 괴산에 내려와 살면서 본격적으로 집 짓는 일을 시작했다. 그때는 주로 절 공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매년 이곳으로 귀농 귀촌하는 인구가 늘면서 남편도 이 지역에서 일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남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완공한 첫 집은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다. 시골에 내려온 이듬해, 첫 아이를 출산하고 친정에서 산후조리하는 동안 낡은 구옥을 빌려 마련한 신혼집이 홀랑 잿더미로 변했다.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인근에 임시 거처를 빌려 지내는 동안 남편은 손수 제 집을 지었다. 그때는 아직 땅값이 오르지 않을 때라 산 아래 마을 땅을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다. 

집 짓는데 3년이 넘게 걸렸다. 집 짓는 도중에 돈 벌러 가고, 돈 벌어오면 다시 집 짓고를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번듯하게 제 집도 지었지만 목수로서의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누군가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자신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지도 모를 집을 선뜻 의뢰하기에 삼십 대 중반의 나이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예전처럼 타 지역의 공사현장으로 훌쩍 떠날 수도 없게 되었다. 곧 둘째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마을에서 일을 했다. 처마에 지붕을 덧대고, 데크를 짜거나 구들을 놓았고, 작은 오두막을 짓기도 했다. 한마디로 동네 잡목수가 된 것이다. 때때로 남편은 절집을 비롯한 한옥 일을 그리워했다. 아이들이 둘 다 제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타지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장에 간 지 이틀 만에 공사가 취소되어 되돌아온 적도 있었고, 며칠간 밤 새 그린 도면 작업이 헛일이 된 경우도 허다했다. 



남편이 강원도에서 한옥학교를 다닐 때 나는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수지를 한 바퀴 빙 돌아 한적한 곳에 위치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있는 공방에서 가구와 소품을 만들며 주말에 한번 만나는 남편과 연애를 했다. 

그때 목수라는 직업은 얼마나 근사하게 여겨졌던가? 목수라는 이름이 그냥 좋았다. 그 이름 속에 우직한 나무 한 그루가 스며있는 느낌이었다. 내게 있어 목수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목사나 신부, 스님과 같은 종교인 혹은 도를 닦기 위해 길을 떠나는 구도자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더구나 한옥이라 하면 나무라는 물성과 수공구를 이용한 전통방식이라는 좀더 근원적인 함의를 담고 있으니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내 선입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목수의 아내가 되고 나서야 관념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목수라는 직업을 보게 되었다. 남편은 나보다 더 가는 허리에 사십 대 아저씨의 그 흔한 똥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온 뼈마디가 아프다고 밤마다 남몰래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삼십 대부터 등짝이 활 같이 휘었고,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두 손은 유난히 크고 투박하다. 게다가 양쪽 종아리에는 하지정맥류가 꼬불꼬불 창자처럼 심하게 도드라져 있다. 도무지 그 험한 노동의 강도를 감내해 내기에 적합한 체력이 아니다. 온몸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온 남편에게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자는 요구는 감히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이사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세면대와 욕조는 여전히 창고 어딘가에 쳐 박혀 있고, 붙박이장은 이 년째 문짝이 안 달린 상태이며, 야외 수돗가에는 수도꼭지 하나만 달랑 있어서 물일을 할 때면 언제나 바닥이 물바다가 된다. 집에 있는 가구는 기본 세 번 칠하는 마감이라면 한 번 이상 칠한 적이 없으며 최대한 손이 덜 가는 선에서 거칠게 마무리된다. 남들은 남편이 목수라고 하면 원하는 걸 뚝딱 만들어 줄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 집은 예외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이가 취미로 목공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리라. 목수라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임을 알기에 이제 남편을 채근하지 않는다. 이렇게 근사한 집을 지어준 것만도 어디인가? 


큰 딸 나린이가 여섯 살 때 학부모와 함께하는 행사가 있어서 유치원에 간 적이 있었다. 나린이와 동갑내기인 교회 목사님 아들 **이가 “우리 아빠는 목사님이다.” 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나린이가 “우리 아빠는 목수님이다!”라고 응수해서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누군가가 꿈꾸는 집에 대해 고민하고, 도면을 그리고, 땀과 열정을 녹여내 손수 집을 짓기까지의 과정은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거처가 될 작은 우주를 빚어내는 일이라 여긴다. 그런 일을 하는


 ‘그래 얘들아, 아빠는 목수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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