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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06. 2020

일상과 여행이 포개진 삶을 찾아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야겠어.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에 잎이 돋기 시작했다. 벚꽃이 다 지도록 가지만 앙상해서 날마다 지켜보며 기다리던 참이었다. 분홍 뭉게구름 같은 꽃잔디가 시들어갈 때쯤 라임 연둣빛 잎이 쫑긋 돋더니 맹렬한 속도로 무성해지고 있는 느티나무! 매년 반복되는 이 변화를 나는 매번 감탄하며 바라본다. 지금 내리는 단비가 그치고 나면 초록이 빠르게 번져가겠지. 머지않아 여름과 만나겠구나. 흙냄새 올라오는 마당에 서서 산골마을 풍경을 내려다본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치고 남한 땅 정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콕 짚으면, 얼추 내가 사는 마을이 나온다. 어디서나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 빙 돌면 산자락에 시선이 막힌다. 마치 날 가운데 두고 산들이 정답게 강강술래를 하는 것만 같다. 

 결혼과 동시에 이 마을에 내려와 두 딸을 낳고 12년째 살고 있다. 결혼에 일도 관심 없던. 까칠하고 예민한 도시 백수가 두 아이를 돌보는 시골 아줌마가 되어 한 마을에서 십 년 넘게 살고 있다니, 새삼 그 일을 해낸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동력은 히말라야 여행이었다. 


 짙푸른 창공에 은빛으로 빛나는 설산은 내게 마냥 신비한 세계로 다가왔다. 거대한 빙벽에 맞선 등반가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대단히 은밀하고 매혹적이었으며, 산에서 청춘은 보낸 전설적인 산악인의 이름만 떠올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내 존재감을 오롯이 느끼며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인정했던 시간들, 마음의 근육을 다지며 나를 한껏 보듬어 주었던, 바로 여행의 시간이 온 것이다.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이십 대 끝자락, 제어할 수 없는 회의에 시달렸다. 누굴 위해 이렇게 밤낮없이 일하는 걸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지? 내 삶을 근본부터 뒤집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며 찾아왔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이런 의문들을 뒤로 한 채 견고한 울타리 안에 갇혀 몇 년을 보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뾰족하게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난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호주의 국립공원과 숲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돌보던 일과 시골 농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따며 지냈던 기억은 출근 시간의 지옥같은 만원 지하철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물에 잠긴 솜처럼 무거운 몸과 목덜미에 뜨끈하게 와 감기는 누군가의 콧김에 울적해질 때면, 나는 떠나는 상상을 했다. 그곳은 야성이 살 아 숨쉬는 곳이어야 했다. 거대한 자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자기 손으로 먹을거리를 구하고, 직접 집을 지으며, 필요한 물건은 스스로 만들어 쓰는 사람들. 시간과 돈에 속박되지 않고 가진 게 없어도 낯선 여행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여유와 아량을 지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전부가 아님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때, 히말라야가 내게 다가왔다.    

 

 서른이 되던 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네팔로 떠났다. 여행은 예상보다 길어져 네팔을 비롯해 히말라야 산맥에 인접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다가 반년 만에 돌아왔다. 암담했던 이십 대 끝자락에서 만난 히말라야는 내게 구원과도 같았다. 여행이 내게 준 깨달음은 내가 다섯 가지 감각을 지닌 생명체라는 자각이었다. 졸고 있던 감각이 활짝 깨어나 길 위에서 만난 모든 것과 열렬히 교감했다. 시골 마당의 긴 빨랫줄에 자유롭게 펄럭이는 옷들처럼 하늘과 햇살에 내 오감을 활짝 열어둔 채 살고 싶었다.  


 ‘도시를 떠나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야겠어.’


여행에서 돌아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우리는 산골마을에 낡은 구옥을 얻었다. 속리산 기슭, 백두대간 고개 사이 한적한 산골 마을에서 나의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었고, 일상과 여행이 포개진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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