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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06. 2020

내년 봄에 또 만나

숲에서 누리는 은밀한 기쁨

 보슬비 내리는 아침, 뒷산을 오르다가 각시붓꽃을 만났다. 이슬방울 머금은 꽃은 깊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새초롬한 모습에 반해 욕심이 발동했다.


‘저 꽃을 캐서 우리 집 마당에 옮겨 심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온종일 꽃을 생각했다. 결국 어린 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안 돼. 거긴 개네 집이야.

 여기 데려오면 엄마가 없잖아.

 엄마가 엄청 속상해할 거야."



다섯 살 나린이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절대에 힘을 주며...


 집 지어 이사하기 전에 3년 반 정도 임시로 지낸 집이 있다. 마당을 나와 조그만 계곡을 건너 산으로 오르는 조붓한 길에서 이 꽃을 처음 보았다. 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멎을 뻔했던 그 설렘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첫째 아이가 배밀이를 할 무렵이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시골로 왔지만 이듬해에 태어난 아이를 온종일 혼자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살이 쪽쪽 빠지고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에 번질 만큼 힘겨운 나날이었다. 서른여섯, 늦은 출산이었다. 아기가 낮잠이 들면 후다닥 숲으로 달려가 오솔길을 걷는 게 내 유일한 쉼이었다. 이것도 그나마 힘이 붙어있을 때라야 가능했던 일. 4월 하순께, 그날도 봄 햇살로 부스스한 얼굴을 씻으며 숲길로 접어들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스락대는 내 발소리가 들렸다. 봄 숲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가의 얼굴 같았다.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소나무 사이를 통과한 햇살을 받으며 발밑에 피어있던 각시붓꽃.



 ‘어머나!’ 하고 놀라던 내 시선과 ‘아 들켰네.’ 하며 수줍게 바라보던 꽃과의 첫 만남이었다.

꽃을 감싸고 있는 가늘고 뾰족한 초록 잎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꽃봉오리 모양이 붓을 닮아서 붓꽃이라지. 작게 자라는 각시붓꽃은 수줍은 색시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지. 애기 붓꽃이라고도 한다지. 그냥 보랏빛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색이다. 연보라, 짙은 보라, 분홍 보라, 파랑 보라, 꽃잎 하나에 각기 다른 농도와 색감의 보랏빛이다. 잠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자연이 만든 색이다.    



 그 집을 떠나 옆 마을 산 밑에 집을 지어 이사했다. 주변이 온통 마사토라서 마당은 거름기 없는 모래밭이나 다름없었다. 빈 마당에 거름을 주고 꽃모종을 사서 이 꽃 저 꽃 참 많이도 심었다. 심지어 뒷산에 핀 양지꽃과 제비꽃을 옮겨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임을 알게 되었다. 냉이와 쑥을 비롯해 씀바귀, 토끼풀, 지칭개, 민들레, 제비꽃 등 온갖 풀씨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해마다 싹을 틔웠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사람이 곁에 두고 가꾸지 않아도 때가 되면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 그래서 야생화라 부르는 거겠지. 그 계절에 그곳을 지나는 자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알아보는 자에게만 허락된 은밀한 기쁨이다.



 ‘나린아, 알려줘서 고마워. 내년 봄에 숲에서 또 만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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