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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08. 2020

솔멩이골을 그리다

마을 주민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

 

솔멩이골에는 젊은 이웃들이 꽤 많다. 무슨 일로 모였다 하면 먼저 수다가 반, 그리고 일이 반이다. 물론 일하면서도 수다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곤 했다.


그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왔을까? 농사지으며 한 달 생활비는 나올까? 니어링의 후예를 꿈꾸던 삶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을까? 누군가 이 마을로 이사 올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저마다 이곳에 정착한 사연은 달랐지만, 공통분모 하나만은 확실했다. 학벌, 돈, 직업을 성공의 척도로 따지지 않으며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아야 한다는 믿음! 이들을 이웃으로 만난 건 굉장한 인연이라 여겼다.





그동안 함께 나눈 이야기가 차고 넘쳤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농사지어도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며 한숨짓던 언니들 얘기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고, 남편 흉보는 얘기, 시댁 얘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게 다 그렇구나 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재잘재잘 끊임없이 수다를 늘어놓던 귀여운 동생들, 무슨 일이든 서슴없이 도와주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인 마을 언니들. 그녀들이 자기만의 언어로 맛깔나게 들려주던 이야기에 손뼉 치며 깔깔 웃기도 하고 남몰래 가슴앓이했던 시골 살이의 고충을 늘어놓을 때면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기도 했다. 작은도서관과 공부방을 만들어 마을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바느질 모임, 드로잉 모임, 마을과 학교가 함께하는 각종 행사 등... 끊임없이 놀고 배우며 즐겼던 뿌듯한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함께 나눈 그 모든 이야기가 우리 마을의 역사가 되었고, 반복되는 삶의 고비를 넘기는 힘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이야기들을 본인이 직접 그림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그림책 만들기 한번 해볼까?”


어느 여름날, 마을 무인 카페 ‘살롱 아낙’에서 이 얘기를 툭 던졌다. 카페 청소를 위해 들른 두 언니와 나, 이렇게 셋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였다.

“그거 하면 되지 뭐. 걱정 마, 돈은 내가 어디서든 끌어올게.” 무슨 일이든 되게 만드는 아랫집 언니였다. 추진력과 책임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가 아는 최강 ‘오지라퍼’ 언니였다. 다음 해에 언니가 공모한 기획안이 충북문화재단 지역특성화 사업에 통과되어 8개월 동안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미대를 나온 이력으로 마을에서 드로잉 강사가 되었다. 수업할 때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그림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림을 많이 그려보지 않았고, 십 년 전 여행 에세이 한 권을 출판한 경험이 전부인 아마추어다. 책 만들기 수업 첫날, 마을 사랑방인 ‘하늘지기 꿈터’에서 마흔 개의 눈이 반짝이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쥐가 났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이걸 시작했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림에 글까지 보태 책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처음에 가진 자신감이 슬그머니 두려움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앞선 해에 마을사업으로 6개월간 드로잉 수업을 진행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림책 작가를 초빙해 책 만드는 과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충남 부여에 있는 송정 그림책 마을을 다 함께 견학하고 온 뒤부터 차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이 수업에 참가한 이웃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멋진 그림을 하나둘 그려냈다.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음식 맛은 천차만별이듯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붓이냐에 따라 터치와 색감도, 바라보는 시선과 주제도 각양각색이었다. 붓을 든 이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그림 속에 담겨있었다. 매주 새로운 그림을 만나는 기쁨은 컸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개성 있는 그림들, 각자 그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가 오래 묻어두었던 꿈과 만나기도 했다. 기꺼이 들려준 내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벚꽃 필 때 시작한 수업은 여름을 지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질 때쯤 마무리되었다. 이제 한 달간 책을 만들어내는 일만 남았다. 사람들이 건네준 글과 그림을 정리해 손으로 넘겨볼 수 있는 책이라는 형태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젊은 디자이너와 협의하며 인디자인과 인쇄의 세계를 처음 경험했고, 발 동동 거리며 홀로 애태우던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솔멩이골 주민 열한 명의 그림책이 탄생했다. 이 책들이 나오기까지의 전 관정을 다룬 내 책을 비롯해 야생화 그림책, 귀촌 그림일기, 열두 살 때부터 쉰 살까지 쓴 일기를 엮은 책, 요리 그림책, 가족 여행 그림책 등 글도 그림도 개성이 넘쳤다.  







내 책을 만드는 일,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기성작가들이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을 갖고 있어요. 책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바로 ‘나’ 예요.

 우지현 그림책 작가 『더미북 워크숍』, 솔멩이골 주민 책 만들기 수업 중, 2018



슬픔이든 기쁨이든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알고 들려줄 줄도 아니까. 우리 마음속 이야기는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진심 어린 편지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바로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나의 진심 어린 편지였다는 것을.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내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하고 엮어 내는 것. 내가 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중, 김현우 역, 반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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