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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May 28. 2021

시련이라는 놀라운 축복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전환점이다

꽃다운 스무 살 봄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왔다.     


5살에 갑작스럽게 할아버지를 여의었던 아버지는 쉰도 채우지 못한 49년으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평생을 알코올에 의지해 살다 간 경화가 회복되지 못했다. 49년의 힘겨운 소풍을 일찍 마치고 떠나가셨다. 가족으로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던 아버지가 호흡이 끊어진 차가운 몸이 되어 꽃이 피어나는 4월의 봄날 관속에 누워 계셨다.  


아버지로 인해 가정은 매일 전쟁이었다. 나는 전쟁터가 너무 두려워 집에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를 피난처 삼아 평안을 찾았다. 피난처는 태풍과 폭풍을 만날 때 필요한 것이다. 태풍과 폭풍이 없는 인생은 굳이 피난처를 찾을 필요가 없겠지만, 내 인생은 매일 같은 태풍과 폭풍이 아버지로 인해 몰아쳤다. 피난처를 매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셀 수 없는 날들을 피난처에 숨었다.     


아버지와 한집에서 살았던 시간이 20년이나 되었다. 아버지와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계셨다. 퇴근길 비틀거리며 걸어오시는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풍겨왔던 술 냄새가 싫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은 온종일 집에 계셔도 말 한마디 없으셨다. 신문을 넘기시며 말이 없이 앉아 계시거나 집안 이곳저곳을 수리만 하셨다. 어린 시절 나처럼 아버지도 내향성의 성격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갓 마흔이었던 젊은 엄마는 과부가 되었고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힘겨운 가장의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이었던 삼 남매는 할머니로부터 분가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없이 명절을 지내고 친가 가족 행사를 맞이하는 것이 마치 우산 없이 오는 비를 다 맞아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딸 바보 아버지를 둔 사람이다. 딸을 향한 사랑이 눈에서 철철 흐르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지금도 마음이 뭉클하고 부러워진다. 마흔의 중반을 지났지만,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자리가 텅 비어있다.     


《하워드의 선물》에서 하워드 교수는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에, 세상은 전환점이라는 선물을 숨겨놨어. 그걸 기회로 만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네.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당신의 전환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혼이 신기하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되더라는 것이다. 대부분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을 때 넘어짐은 실격이고 탈락이니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워드 교수는 넘어진 그 자리가 실패가 아닌 전환점이라고 조언했다.     


내 인생에도 많은 실패가 있었는데, 대부분 환경으로 주어진 실패였기에 더욱 비참했다. 그 실패가 내 인생을 추락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넘어진 그 자리는 추락이 아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하버드대학 제362회 졸업식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식 축하 연설로 강단에 오른 윈프리는 학생들에게 실패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인생에 실패라는 것은 없다. 실패는 우리를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삶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딸의 처지가 아닌 아버지의 관점에서 성찰하게 되면서, 수없이 받았던 상처들을 극복하고 아버지를 너무도 불쌍한 한 인간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알코올을 끊지 못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 상담이나 입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족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갖게 되었다. 상담을 공부해 마음이 아픈 이들의 회복을 돕는 상담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20년 동안 걸었던 어둡고 긴 터널이 드디어 끝이 났다. 20년 동안 알코올 중독 가장을 둔 가족으로 살면서 긴 겨울 동안 견디어야 했던 절망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20대 청춘이 시작되던 때에 맞이한 가장 슬프고 아픈 일이었다. 나의 삶을 내리막으로 걸어가게 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당당히 고백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 덕분에 누구에게도 내 인생을 의지하거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부모의 후광이 아닌 나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올 수 있었다. 가장의 뒷바라지 없이 대학을 다니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학업과 병행해야 했다.


20대 초반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세상을 좀 더 일찍 경험했기에 다양한 만남 속에서 지혜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학비를 넉넉하게 지원받지 못해도 나의 노동을 통해 학업은 이어갈 수 있음을 아버지의 부재 덕분에 일찍 터득했다. 환경과 조건은 늘 열악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비용을 마련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면서 학업을 계속 유지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홀로서기를 하고,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온전히 아버지의 부재 덕분임을 감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젊은 과부가 된 엄마의 현실을 마주했다.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자녀들의 입장과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덕분에 나는 다음 세대를 더 깊이 애정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지혜로운 스승 하워드가 조언해 준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은 걸려 넘어진 자리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부재는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인생을 걸어가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절대 실패나 저주나 불행이 아니다.  넘어진 바로 그 자리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 리본(REBORN)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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