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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Aug 03. 2021

가족은 짐이 아니라 울타리였다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전환점이다

류시화 작가는 그의 저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서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을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삶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세 가지로 구분해 설명해 준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오는 사람, 한 계절에만 등장하는 사람, 평생 만남을 갖는 사람 등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소개한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지금의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다.”

류시화,《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7년 전 건강검진 중 갑상샘암이 발견되었다. 수술을 앞두고 목 중앙에 나비넥타이 모양으로 생긴 갑상샘이 몸의 호르몬을 분비하고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갑상샘에 있었던 혹이 암이 된 것으로 의사는 추정했다. 종양은 갑상샘의 한쪽 가장자리에 있었지만, 전체를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 결과 림프샘까지 전이되어 5개월 후 방사선치료가 예약되었다.      




수술 전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수술하면 피로가 깨끗하게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갑상샘 전체를 떼어낸 후 호르몬 분비가 안 되니 체력이 급감하게 되었다. 호르몬제를 평생  복용해야 했다. 호르몬제를 매일 복용해도 오후 4시가 넘어가면 몸의 배터리가 다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장소가 어디든 낮잠을 자야했다. 반 토막 체력으로 추락했다. 잔병치레하지 않는 체질이었는데 수술 후 체력이 반 토막이 되었다. 한쪽 날개를 잃은 새와 같았다.      


5개월을 병원과 집에서 요양한 뒤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격리실에 입원했다. 먹는 알약으로 방사선 치료를 했다. 방사선 약은 독하고 강렬해서 3박 4일 동안 독방에 격리가 되었다. 아무도 접촉할 수가 없고 외출도 불가능했다. 하루 한 번 회진하는 의사도 방 입구에서 유리창으로 잠깐 살핀 뒤 사라졌다.     


방사선 약이 몸속에서 소변이 되어 완전히 배출되도록 온종일 물과 음료를 마셔야 했다. 구강에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신맛 나는 과일과 사탕류를 종일 입에 물고 있었다. 전신 마취 수술도 처음이었지만 격리 수용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격리된 동안 성경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불치병과 전염병으로 간주하여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 밖으로 쫓겨나 격리 수용되어 살아가야 했다. 3박 4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병 환자들이 느꼈을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감사를 고백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내가 아픈 것이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3박 4일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이제 갓 입학해 다니는 아들은 혼자 학교를 등교해야 했다. 4살 된 딸아이는 동생 집에 맡겨져 유치원을 다녔다. 격리 치료 후에도 유아들과의 접촉은 몸에 남은 방사선의 영향이 있다. 2주 동안 요양병원에 더 머물러 세상과 격리되었다.      


결혼 후에도 학업과 일을 달리며 내 삶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암 수술로 멈춤의 시간이 주어졌다. 체력도 반 토막 나고, 하던 일도 할 수 없어 백수가 되었다.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가끔 침샘 염도 찾아왔다.  인생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멈춤이 고마운 전환점이 되었다. 혼자 격리되어 갇혀있던 시간 덕분에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두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해 왔지만 정작 나는 두 아이를 양육하는 육아에 기쁨과 감사가 별로 없었다. 성격적으로 방랑벽이 심한 나에게 육아는 훨훨 날아가고 싶은 내 발목의 족쇄 같았다.  창공을 날고 싶었던 나를 둥지 안에 머물게 하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딸이 4살이 될 때까지,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까지 결혼을 괜히 했다고 종종 생각했었다.      


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건강을 잃어서 기능할 수 없는, 버려진 고장 난 시계 같았다. 그런데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나를 한결같이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울타리 같은 가족이었다.     





내가 병들었어도 남편은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필요로 했다. 

내가 쓸모가 없어졌으나 두 아이는 여전히 사랑하는 엄마를 필요로 했다. 

병들고 쓸모가 없어져도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역할을 하든 못하든, 엄마 역할을 하든 못하든 가족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발 딛고 살아왔던 모든 곳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나를 보호해 주는 따뜻하고 튼튼한 울타리가 바로, 가족이었다.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격리의 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내 삶에 부여해 주신 삶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앞에 나를 무릎 꿇게 하기 위해 어두운 동굴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어두운 격리의 시간은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했던 가장 소중한 선물을 보여 주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선물은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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