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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Aug 03. 2021

세상에서 가장 어마어마한 일

우리는 모두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방문객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출간을 계약했다. 오랫동안 마음의 씨앗으로만 간직해 왔던 작가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출간의 꿈을 이루게 된다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되돌아 생각해 보니 긴 겨울 동안 얼어 죽지 않고 건강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 우연과 인연이라는 만남 덕분임을 안다.      


10살 무렵이었다. 매일 술을 드시는 아빠의 속 쓰림을 위해 약국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어느 날 약국 약사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약국 2층에 있는 교회를 다녀보지 않겠니?’ 라고 물어보셨다. 같이 살던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셨다. 초파일이면 할머니를 따라 부처님 불상 앞에서 절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집안에는 교회를 다니는 친척이 한 명도 없었다. 약국 아주머니의 관심으로 가족 중 제일 먼저 교회를 다녔다.      


 

처음 다니게 된 교회는 낯설었지만 따뜻했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날 작은교회라서 몇 명 안 되는 아이 중 선생님은 나를 지목해 독창을 시키셨다. 높은 고음이 나지 않는 목소리를 고려해 낮은 음정을 지닌 찬송가 28장을 선곡했다. 오르간 반주로 열심히 연습을 시켜 주셨다. 성탄 이브날 한복을 차려입고 무대에서 독창했던 잊을 수 날의 추억이 있다.      


말이 없고 어두운 나에게 선생님은 관심을 기울여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무대에 서보는 경험을 시켜주셨다. 나의 존재감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주셨다. 선생님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있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나에게 행복한 추억 한 장을 남겨주신 선생님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교회에서 만난 선생님들마다 따뜻하게 나를 품어 주셨다. 나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주셨고, 소그룹 시간마다 열심히 성경을 가르쳐 주셨다. 때로는 선생님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 주기도 하셨다. 사춘기가 찾아올 중고등부 시절 특별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통해 폭풍이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도 방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 후 4월의 봄날, 평생 알코올로 지탱하던 아버지의 인생이 종료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에게 정을 떼려고 하셨는지 고3 시절 내내 폭풍의 눈이 되어 주셨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보살핌이 필요했는데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더욱 격해졌다.      


가장 위태로웠던 고3 시절이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들 방황하지 않고 나를 지켜 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만남 덕분이었다. 고3 시절 교회 선생님은 직업 군인이셨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매주 자필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편지에 화려한 문구나 거창한 내용은 없었다. 한 주간 안부를 묻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힘내라는 진심이 담긴 편지였다.      


매주 우편으로 전해지는 선생님의 편지가 고3 내내 흔들리는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폭풍이 계속 몰아치지만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고 나를 토닥여 주었다. 매주 편지를 써 보내주셨던 선생님의 돌봄이 떠내려가지 않게 해준 배의 닻이 되었다. 그 선생님을 못 만났더라면 나는 가출 소녀가 되었던지,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을 거침없이 낭비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좋은 만남은 담요가 되고, 따뜻한 난로가 되어 주었다. 겨울이지만 세상은 살만한 곳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만남의 인연들이 강을 무사히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폭풍이 지나가기까지 버티고 견딜 수 있는 따뜻한 온기가 되었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 있다면 바로 이날

내가 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난 날이다.’ 

헬렌 켈러,헬렌 켈러 자서전》      


생후 19개월 시각과 청력을 잃은 헬렌에게 설리번 선생님이 찾아왔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을 만났던 날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고백한다. 설리번 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등록해 정규교육을 받게 되었고, 시청각 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학사 학위를 받는 영예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중고의 장애를 지녔지만, 헬렌은 설리번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꽃을 활짝 피워냈다.


설리번이 어린 시절 엄마는 일찍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충격으로 실명까지 했다. 설리번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다. 결국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다. 모두가 설리번의 치료를 포기했을 때, 늙은 간호사인 로라가 설리번을 돌보겠다고 자청했다. 로라는 그냥 설리번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설리번에게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어느 날 설리번 앞에 놓아준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었다. 점차 설리번은 독방 창살을 통해 반응을 보였다. 2년 만에 설리번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 장애아학교에 입학해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수술 후 어느 날, 설리번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을 구한다’ 라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다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아이는 도저히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설리번은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인생에 주어지는 모든 만남에는 신비가 있다. 

모든 만남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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