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할 수 있을까
20대에는 자유로움을 동경했다. 내가 가장 닮고 싶었던 사람은 7년 동안 혼자서 세계 오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한비야였다. 많은 우리나라 여성들이 ‘이 나이에’와 ‘여자니까’를 달고 살던 시절, 직장을 다니던 그녀는 서른다섯 살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바람의 딸이 되어 7년 동안 그녀가 자유롭게 여행한 흔적들이 좋았다.
그토록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동경했던 내가 스물일곱 결혼을 했다.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고 함께 있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어린 시절의 불행한 결혼 풍경을 밀어내고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결혼은 싱글의 자유로움을 속박했다. 결혼한 지 일 년 후 임신이 되고 출산을 했다. 아들과 딸 사이에 5년의 터울이 있다 보니 육아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어린 두 아이를 안고 업고 다니는 게 너무 덥고, 무겁고, 어깨가 아팠다. 육아는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연로하신 어르신들은 아기 띠를 하고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나를 보시면 ‘지금이 제일 행복할 때야’ 라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 시절 행복이라는 단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고개를 흔들며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라며 그때의 행복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었다.
시간이 신속히 흘러갔다. 아들은 청소년이 되었고, 딸은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이제는 품에 안아주고 싶어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폭풍 성장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 그 어르신들 말씀이 백번 옳았다. 두 아이를 안고 업고 있었던 그 시절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청춘이었다. 또 오늘 하루 지금이 지나고 나면, 나는 오늘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답고 젊고 행복한 날이었다고 고백하게 되리라.
나는 엄마의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났다.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내 인생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느꼈는데 엄마는 비슷한 나이 결혼을 해 아내와 며느리, 엄마가 되었다. 결혼 후 엄마의 푸른 20대와 30대의 시간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함께 모시고 살았다. 남편은 늘 흔들리는 인생이 되어 기댈 언덕이 되어주지 못했다. 마흔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된 마흔의 엄마를 그 시절 젊고 예쁘다 한 번도 여기지 못했었다. 엄마는 여자가 아닌 보통 우리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삼 남매 가장의 책임을 물려받았다. 막내 남동생이 늦은 결혼을 할 때까지 엄마는 든든한 가장이 되었다. 삼 남매에게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엄마는 슬퍼도 슬프다,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하고 오뚜기처럼 살아오셨다. 시간이 흘러 결혼 후 두 아이를 기르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 마흔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내가 마흔이 되어보니 여자 마흔은 그리 젊고 아름다운 눈부신 나이였다. 아이 둘의 엄마였지만 마흔의 나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워 눈부신 청춘이었다. 과부가 되어 홀로 남겨졌던 엄마의 마흔도 나의 마흔처럼 그리 젊고 아름다웠을 텐데 아름다운 시절을 엄마는 여자로 꽃피우지 못했다. 여자로 사랑받지 못했다. 그저 삼남매의 엄마로만 묵묵히 살아내어야 했던 시간들이 내가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헤아려 졌다.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남편이 곁에 있어 매일 힘을 다해 도와주어도 육아가 벅차고 힘들었다. 남편이 내 곁에 있어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혼자서 삼 남매를 어떻게 키워냈을까?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문득 찾아왔다.
물려준 재산도 퇴직금도 없이 엄마는 맨손으로, 자신의 노동으로 세 자녀를 키워냈다. 엄마의 무릎은 40대부터 이미 70대 연로한 무릎이 되었다. 무릎 연골이 닳아버려 다니던 회사를 퇴직 했다. 작은 식당을 차려 삼 남매를 결혼 시켜 엄마의 숙제를 무사히 끝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주변에서는 젊은 엄마가 재혼할 것 이라 생각했다. 친가와 멀어지고 함께 살던 할머니도 분가하셨다. 엄마는 평생 여자이기를 포기했다. 오롯이 삼 남매의 엄마로 만족하며 묘목과 같은 아이들을 나무로 성장시키는데 인생을 쏟아부었다. 엄마가 거름이 되어 준 덕분에 세 그루 나무들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엄마는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우리에게 사랑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엄마가 우리의 엄마 자리를 지켜 준 것이 사랑이라고 이해했다. 충분히 여자로서의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지만 엄마는 자녀들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우리를 책임지는 헌신의 사랑이었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 기르면서 엄마를 여자로 바라보는 눈높이를 갖게 되었으니 마흔이 참, 기특하다.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나는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꽃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그때의 아름다움을 그때그때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아름다움을 지금 만족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