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의 졸업 발표회에 초대된 엄마들이 자기소개한다. 엄마들은 모두 “000의 엄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아이들의 엄마로, 남편의 아내로 사느라 엄마가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살 시간이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 자녀들이 엄마로서 졸업을 시켜주는 결말이었다. 자녀들의 졸업 발표회로 알고 갔다가 엄마로서 졸업한 후 엄마들은 자기소개하는 시간 ‘00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기소개하며 광고는 끝난다.
귀한 집 자녀로 태어나 고유한 이름을 지닌 딸들이 결혼 전까지는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결혼 후 출산하면서부터 “00의 엄마”로 자신을 이름을 짓는다. 나도 출산 후부터는 “동욱이 엄마”, “사랑이 엄마”로 불리어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출산한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이름과 정체성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엄마 졸업식》의 저자인 오혜경 작가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해 괴로웠다. 갑작스러운 3개월 시한부를 선고받고 돌아가신 엄마의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며 엄마의 인생이 허무했다. 그 억울함을 풀어내고 싶었다. 살아계실 때는 미처 몰랐던 엄마의 사랑이 임종을 맞으면서 피부에 와닿았다. 엄마가 죽는 그 순간까지 딸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계셨음을 전율했다.
뒤늦게라도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오혜경 작가는 엄마가 준 상처로 인해 엄마를 헤아리게 되었다. 보고 싶은 엄마를 추억하며 써 내려간 글이 마음속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료제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엄마를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자신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엄마 졸업식》을 썼다.
책을 집필하면서 엄마를 기리기 위한 글쓰기가 오히려 그녀 인생의 새로운 나침반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인생의 커다란 획 하나를 그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엄마를 보낸 첫해의 슬픔에서 벗어나면서 세상 떠나기 전의 엄마 소원이 무엇이었을까를 오혜경 작가는 고민했다. 그녀의 엄마는 무엇보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다. 엄마의 소원을 늦게라도 이루어드리고 싶었다.
3주기를 맞아 엄마에 관한 책 한 권을 남겨드리기 위해 그녀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엄마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책의 목차 앞에 엄마의 이름을 넣어드렸다.
“인생의 영원한 스승인 엄마,
오성례 님께 바칩니다.”
《엄마 졸업식》
돌아가신 엄마처럼 책을 통한 나눔으로 받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비슷한 아픔에 있는 독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더 나은 상황에 있는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는 책이 되기를 원했다. 오혜경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한 삶의 풍경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주었다.
우리 엄마도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별했다. 남겨진 재산도 없이 삼 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엄마의 노동으로 오롯이 삼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늘 전쟁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평화는 찾아왔으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고된 직장맘으로서의 일상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무릎이 망가져 이제는 걷는 일이 힘들어지자 엄마는 작은 식당을 차려 삼 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치고 결혼을 시켰다. 막내 남동생의 결혼과 함께 엄마의 막중했던 과제는 모두 종료가 되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늘 삼 남매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까를 고민하고 못 해주는 것을 미안해하고 삼 남매와 손주들을 늘 걱정하신다.
작년 초 유방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마치신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회복하시느라 1년이 흘렀다. 어버이날 엄마와 함께 식사하면서 용돈과 꽃바구니, 퇴고 원고를 선물로 드리고 왔었다. 가장 먼저 엄마에게도 내가 처음으로 집필한 첫 책을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
오혜경 작가가 엄마의 이름을 앞장에 넣어 기념한 것처럼 엄마의 존재는 나에게도 가장 묵직한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오랫동안 엄마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할머니가 엄마 대신 살림을 다 해주셨기 때문에 한집에서 27년을 살았어도 엄마와는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재혼하지 않고 삼 남매를 위해 여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 그저 엄마로 살아가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머리로 사랑을 헤아렸다. 오혜경 작가가 엄마 살아생전 풀지 못했던 감정의 앙금들이 나에게도 오랫동안 쌓여 있었다. 정다운 다른 모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늘 부러웠었다.
8년 전 내가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엄마와의 심리적 거리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지속되었을지 모른다. 내 건강이 무너지는 순간 큰딸을 향한 엄마의 애절한 사랑을 가슴으로 처음 느꼈다. 엄마의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다. 자신을 버려 딸을 간호해 주시는 엄마의 사랑을 감정으로 처음 느꼈다.
오랜 기억 속에 불행했던 과거들을 원고로 마주하며 엄마도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리라. 살면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딸의 상처와 아픔들을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더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아빠를 향한 첫사랑 고백을 담은 에필로그를 보고 엄마는 장문의 긴 편지를 보내 주셨다.
그리고,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 없는 나에게 에피소드 하나를 전해 주셨다. 내가 태어난 후 나흘쯤 되었을 때 아빠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응급실에 급히 실려 가셨는데 응급처치로 살아난 아빠가 집에 오신 후 갓 태어난 나를 안고서 안도의 목소리로 말씀하셨단다.
“내가 죽었으면 우리 아기가 얼마나 불쌍했을까?”
‘아빠가 나를 안아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아빠로서 지극히 딸을 사랑했음을, 아빠의 깊은 사랑이 나에게 표현되지 못하고 전달되지 않았을 뿐임을 알려 주셨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우리 아빠도, 엄마도 장녀인 나를 누구보다 절절히 사랑했으나 나에게는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아 사랑으로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엄마 졸업식》을 읽으면서 오혜경 작가의 엄마가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딸이 올 때마다 딸기를 준비하는 엄마에게 딸기는 곧 딸을 향한 사랑 표현이고 애정이었다. 딸이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집에 오기 며칠 전부터 준비하는 엄마의 그 마음이 지극한 사랑이었지만 그녀 역시 사랑임을 몰랐다.
“궁핍하게 살던 마포 시절이야
과일 먹을 엄두를 못 냈지만,
강서로 이사 오고 경제적 여력이
생기자 과일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
딸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봄이면 잊지 않고 사주셨다.
정작 엄마는 딸기를 몇 개만
드시고 먹는 내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셨다.
며칠 뒤 엄마 집에 가니,
딸기를 내오셨다.”
《엄마 졸업식》
딸기 대목을 읽으면서 총각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수시로 총각김치를 담아 주셨던 엄마가 떠올랐다. 총각김치는 딸을 향한 우리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고 애정이었던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마지막 학기에 대학 졸업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제주도 여행비가 10만 원이었는데 40만 원 정도의 비용으로 저렴하게 갈 수 있어 대만으로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졸업여행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엄마는 꼭 함께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가방이며 준비물들을 엄마는 아낌없이 사주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형편에 그때는 엄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아빠라는 날개를 잃은 딸이 기죽지 않도록 똑같이 졸업여행을 보내주고 싶었던 엄마의 배려 깊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엄마를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엄마 졸업식》
저자가 고백한 것처럼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이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겨운 일인데 혼자된 엄마가 여자의 힘으로 세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까. 아버지는 퇴직금이나 넉넉한 유산을 준비하지 못해 우리는 엄마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학교를 다녔다. 마흔에 과부가 되었던 엄마를 그때는 여자로 바라보지 못했다. 삼 남매의 엄마로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엄마의 여자로서의 삶을 한 번도 헤아려보지 못했다.
결혼 후 출산을 해보니 아이 하나를 남편과 함께 케어하는 것도 얼마나 고됨이 가득한지 우리 엄마는 어떻게 삼 남매를 혼자 키우셨을까 존경심이 들었다. 내가 마흔이 되어보니 아내이고 엄마였으나 여자로서 여전히 빛나는 젊음을 지니고 있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남자들의 대시가 마흔이 되어서도 계속되었으니 여자 마흔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이였다.
마흔에 과부가 되고, 삼 남매의 엄마라는 짐을 넘겨받은 엄마는 여자로서의 삶을 감히 꿈꾸지 못하셨다. 세아 이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에 정신없는 세월을 살아내셨다.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자리에 서보니 엄마가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아내셨는지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고된 엄마의 자리를 지켜내느라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망가져도 자식들에게 아픈 티를 낼 수 없어 혼자 울고, 혼자 마음 앓이 해야 했던 시간이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어렴풋이 보였다.
“엄마는 자식이 걱정할까 봐 분명히
속내를 다 말하진 않으리라.
그런데 중간에라도 무엇 때문에
‘힘들면 힘들다’라고 조금이라도
귀띔해 주었더라면 말벗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을 것을.
먼저 살갑게 다가가지 못한 미련이 남는다.
《엄마 졸업식》
자궁근종이 8cm가 될 때까지 수술을 미루었던 엄마는 만약 남편이 있었더라면 훨씬 더 일찍 수술을 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아팠다. 두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연골 교체 수술을 하기까지도 엄마는 오랜 망설임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편이 있었더라면 통증으로 고생하는 기간이 훨씬 줄었을 텐데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못하고 엄마는 혼자 고통을 참고 감내하셨다.
예측하지 못한 엄마 졸업식을 맞이했던 오혜경 작가의 절절한 안타까움을 마주하며 작년 초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셨지만 아직 우리 엄마가 곁에 머물고 계시니 다행이고 감사하다. 남은 엄마의 여생을 엄마답게 꽃 피우며 살아가시기를 응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