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신다. 요양병원을 갈 때마다 침상에 누워 거동할 수 없는 어르신들의 풍경을 마주한다. 죽음이 나를 찾아와 손 내밀기 전까지 직립보행할 수 있는 다리의 힘을 달라고,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갈 에너지를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몇 년 전부터 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생이다. 100년을 살아온 김형석 교수에게 많은 사람이 장수의 비결을 묻는다. 100세에도 왕성한 집필과 강연을 펼치며 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궁금해한다. 김형석 교수는 아직 매일 원고지에 집필하고 칼럼을 쓴다. 책도 계속 출간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강연을 소화한다. 매일 일기를 쓰고 하루도 빠짐없이 수영으로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한다.
“ 성공과 실패의 객관적 기준은 있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달성한 사람은 행복하며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주어진 유능성과 가능성을 다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백 년을 살아보니》
100세까지 살아야 한다면 김형석 교수처럼 살고 싶다는 강렬한 소원을 품게 한다. 그의 저서 《백 년을 살아보니》는 100세를 살면서 성공과 행복의 관계를 성찰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많은 사람이 가시적인 소유를 통해 주어지는 만족감을 행복이라고 하지만 김형석 교수는 ‘그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라고 정의한다. 소유가 상실되면 고통과 불행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창작의 기쁨과 행복이 높은 차원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행복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데 선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에서도 ‘자기 조절 능력’과 ‘대인 관계 능력’이 회복탄력성의 핵심 요소라고 설명한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평소에 대인관계를 잘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대인 지능이 높은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편안하게, 행복하게 해 주며 강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삶의 조건은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이다. 김형석 교수가 100세가 되어 가장 중요하게 조언하는 부분이다. 선하고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라고 한다. 누구에게든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좋은 만남을 만들어 가고 누리는 행복이 장수하는 그의 비결이다.
혈연이나 가족, 친척이 아닌 분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좋은 만남을 통하여 결핍이 채워졌고,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했다. 좋은 만남이 내 인생을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만남이 되고 싶었다. 결핍이 있는 이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과 돌봄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인생에 주어지는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나에게 다가온 모든 만남을 축복으로 받는다. 만남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만남을 통해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왔다. 살아오면서 나에게 다가온 모든 만남은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었고, 징검다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만남’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한 가지만 축복을 나에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좋은 만남의 축복을 선택할 것이다. 앞으로의 걸어갈 인생길에도 평생 좋은 만남이 쉼 없이 펼쳐지기를 늘 기도한다. 나의 자녀들에게도 어디를 가든지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기를 축복한다. 나의 노년이 좋은 만남을 통해 한결같은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출간 후에도 좋은 독자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갈망한다.
100세를 훌쩍 넘은 김형석 교수는 늙음에 대한 슬픈 성찰을 나눈다. 1961년 늦은 여름 미국 LA 인근 공원에 산책하러 갔다 예상 못 했던 풍경에 놀랐던 기억을 회상했다. 백인 할아버지들이 공원에 가득 차 있는 풍경을 보면서 ‘늙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물건도 쓰다가 낡으면 버림을 받고, 가축들도 늙으면 필요가 없어지듯 인간도 늙으면 버림을 받는듯한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의식주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주지만 늙어서 버림을 받는 사람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고 회상한다.
처음 미국에서 마주한 장면에 김형석 교수는 늙음이 참 쓸쓸하고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년이 지나 다시 여름을 미국 남부에서 보냈다. 시설이 잘되어 있는 양로병원을 보면서도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소외감과 고독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밀리고 밀려 양로병원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두가 외로워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어 보였다고 회상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한국에서도 좋은 의료시설과 산책과 건강을 위한 시설들이 잘 갖추어진 양로시설이 많아진다.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40대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된다.
차라리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백 년을 살아보니》
하지만 조용하고 하는 일이 없는 분위기는 더 빨리 늙음을 재촉한다고 이야기한다.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세월의 흐름이고 자연의 순리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 사회는 늙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김형석 교수는 지적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가 했던 대사가 기억나는 대목이었다.
이적요는 70대 노시인이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고 살던 집이 문학관으로 바뀔 정도의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은 거목 시인이다. 문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은 있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 글쓰기를 그만두고 집에서 혼자 지낸다. 매일매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며 별 의미 없게 살아간다.
영화 초반에 이적요가 옷을 벗고 자신의 늙은 전신을 훑어보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다. 60대가 되든 70대가 되든 나이 든 자신의 늙은 모습을 마주하는 건 누구나 반갑지 않고 익숙하지 않다.
제자 서지우는 스승 이적요의 글쓰기 재능을 탐하고, 스승 이적요는 은교의 싱그러운 젊음을 탐한다. 서로가 갖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탐하지만 결국 갖지 못한다. 아무리 탁월한 삶을 살아내도 늙음은 어쩔 수 없음을 영화 은교에서 시사한다.
영화 속 이 적요에서도, 김형석 교수의 책에서도 늙음을 대접받지 못하고 밀려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성찰이 느껴졌다. 평생을 철학자로, 교수로 살아왔지만, 김형석 교수도 늙음을 피할 수 없었다. 장례식 문상을 하는 것도 이제는 삼가게 된다.
“제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90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한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정성껏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해 주고 싶습니다.”
《백 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교수는 100세가 넘었지만,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같이 머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언젠가 떠나갈 날이 오겠지만 이별의 시간에 담담하게 자신을 보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고백한다. 자신의 아내가 오랜 투병을 했지만, 병원이나 시설에 보내지 않은 것을 참 잘했다고 회상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
청춘의 시기를 지나 중년의 시기로 접어드는 지금이 육체적인 쇠함을 보며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 어느 정도 독립이 되고 가장 왕성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기로 접어드는 것이 기쁘다.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가족을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의 계발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진입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가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낸 일처럼 앞으로 내가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일이 되기를 기대한다. 인생의 목적이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의 진로와 꿈을 찾아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도록 돕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마음이 무너진 이들의 회복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 마음의 치유를 돕는 일에 열심을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