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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Nov 01. 2021

가장 활짝 피어나는 때가 온다

감사 마스터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이 필 때 줄기에 잎이 전혀 없는 참, 신기한 꽃이다.      


꽃 모양이 비슷하게 보이지만 상사화 꽃은 8월에 개화하고, 꽃무릇은 9월~10월 사이 개화한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먼저 자라 6월부터는 시들기 시작하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진다. 꽃무릇은 꽃이 진 후 잎이 나는데 겨울을 나고 이듬해 5월에 시들어 8월 초에 사라진다. 상사화와 꽃무릇 둘 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다.      



꽃집에서 파는 꽃만 꽃이고, 봄에 피어야 꽃다운 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여름과 가을에 잎이 없이 피어나는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을 바라보는 시선에 새로운 여운을 안겨 주었다.      


화려한 봄날 피어나는 꽃들에서 사람들은 주목하며 꽃구경하러 다니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봄에 피어나는 꽃들도 한꺼번에 피어나지 않는다. 겨울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제일 먼저 동백이 수줍게 피어나고, 산수유와 매화, 목련이 꽃봉오리를 차례로 터트린다. 봄날의 따사로움이 더해질 무렵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유채꽃, 튤립이 피어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철쭉이 흐드러지게 강렬한 화려함을 뽐내며 피어난다.      


가을의 꽃들이든, 봄날의 꽃들이든 자기의 속도로 피어날 때를 따라 피어난다. 재촉하지 않고, 늦게 피는 것에 조바심 내지 않는다. 꽃들에는 가장 활짝 꽃 피어나는 때가 반드시 온다.     




결혼 후 이전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늘 목표를 향해 달음질했던 삶이었는데 어느 순간 브레이크가 걸려 움직여지지 않는 날들이 답답했었다. 다들 속도를 내어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었다. 졸업 후 자리를 찾아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절망했었다.      


2002 학번으로 대학원을 함께 입학했던 동기들은 3년 후 졸업했다. 입학 후 두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느라 첫아들을 낳고 3년, 둘째 딸을 낳고 3년 휴학을 했다. 덕분에 2013년이 되어서야 겨우 졸업했다.      


졸업하기 전 인생의 속도가 달팽이처럼 느리다 한탄하며 대학원 중퇴를 여러 번 고민했었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가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싶다는 충동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완벽주의 성격에 수업에 지각하느니 결석 처리를 했던 나는 기나긴 휴학생의 처지를 비관했었다.      



남들 이십 대에 하는 배낭여행은 삼십 대 후반에 했고

첫 직장도 남보다 10년은 늦게 들어갔고

구호 활동도 내 또래 요원은 벌써 20년 차도 넘는 

베테랑인데 나는 이제 9년 차햇병아리를 겨우 면한 상태다.”

한비야그건사랑이었네


한비야도 모든 걸음이 늦었다고 했다. 그녀가 마흔이 되던 해 중국에 어학연수 간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 나이에 중국어를 배워서 어디에 쓰겠냐고 했다. 마흔에 배워 여든까지 40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중국어를 해외에 다니면서 얼마나 유용하면서 재미있게 쓰는지 모른다고 그녀는 자랑했다.     


무엇을 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가?

내 경험상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시작하는 편이 백배천배낫다.”

한비야그건사랑이었네     


너무 늦었다고 여겨 중퇴를 고민하던 나에게 그녀의 친절한 조언이 햇살 같은 위로가 되었다. 졸업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졸업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의 저울추를 옮겼다. 그녀의 조언 덕분에 11년 만에 졸업이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2013년 잊을 수 없는 졸업식이 되었다.      



초봄의 개나리처럼, 한여름의 해바라기처럼, 가을의 국화처럼, 한겨울의 매화처럼.

사람도 각자 피어나는 계절이 다르다는 것, 계절은 다르지만, 꽃마다 피어날 기회가 오듯, 나에게도 가장 활짝 피어날 때가 반드시 온다는 토닥임에 용기를 얻었다.   

   

계속 성장하고 싶지만, 나무가 잠시 성장을 멈추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것처럼, 되돌아보니 휴학으로 11년 동안 정지되었던 시간은 꽃을 피울 준비를 위한 소중한 멈춤의 시간이었다. 성장과 전진을 멈추었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두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했던 첫 생애의 3년을 오롯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시간이 흘러 흘러 아들은 벌써 고3 청년이 되었고, 딸은 사춘기 중학생 소녀가 되었다. 두 아이에게 온전히 엄마로서 함께 할 수 있었던 멈춤의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자신에게 가장 잘했다 칭찬해 주고 싶은 구간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각자 피어나는 계절이 다름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 

내가 그랬듯 모든 아이도 자신의 계절에 가장 활짝 피어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제철이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이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

한비야중국 견문록     


아이의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될 때 각자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름을 감사한다. 

지금 꽃 피어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피어날 제철이 아님을 감사한다.

이제는 재촉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아이가 가장 활짝 꽃 피울 때를 기다리며 감사한다. 

꽃들이 각자 피어날 계절이 다른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계절이 되면 활짝 피어날 꽃임을 감사한다.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걸어왔으나 꽃을 피워가는 내 인생을 최고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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