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스페인 가을 여행(12)

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by 기현서

9. 가랑비 내리는 팔마 데 마요르카 걷기(11.10)


호텔의 아침 식사 그리고 크라상


머물고 있는 호텔은 아파트 호텔로 4성급이다. 규모가 작아 투숙객이 많지 않아서인지 아침 식사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식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로비의 한 공간을 아담하게 꾸며 오전 8~10시 중 식당으로 활용한다. 그 이후 시간은 휴식공간이다. 서고에 상당한 양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공간에 놓여 있는 음식의 질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크라상을 뜯어 한입 먹었다. 너무 맛있다. 오랫동안 그리웠던 맛이다. 유별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은 내가 빵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20 년 동안 해외에서 생활하며 익숙해진 탓이다.


나는 특히 크라상을 좋아했다. 겉이 바삭하며 속은 촉촉하고 버터 향이 짙은 크라상을 커피에 곁들여 먹었다. 커피 한 잔에 중간 사이즈 크라상 3개가 아침 식사였다. 이 호텔 크라상은 사이즈도 크고 내가 원하는 속성을 다 갖추고 있다.


아내는 아메리칸 스타일 아침을 좋아한다. 스물일곱 살부터 함께 해외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서양 음식을 잘 먹었다. 아침 식사가 기호에 맞았는지 아내의 먹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천천히 잘 씹어 먹어' 하고 조용하게 말하자 멋쩍게 웃는다. 아내는 음식을 맛있게 잘 먹고 난 뒤 급체해 2~3일 꼼작 못하고 누워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 중 그런 일이 있을까 봐 조용히 관리하고 있다.


아내의 여행은 음식 여행이다. 그녀는 음식을 통해 도시를 기억하고 추억한다. 19 년 전 여행했던 스페인 북서부 포르투갈에 가까운 항구 도시 비고(Vigo)를 얘기하면 '아! 거기 해산물 찜... ' 하고 얘기한다.


이번 여행의 목적도 아내의 음식 기호에 맞추고 있다. 어느 도시를 가나 점심은 좋은 식당에서 아내를 대접해 드릴 생각으로 있다. 또 그렇게 하고 있다. 비행기 타고 먼 길 와 비싼 숙박비 내면서 점심 값 아끼면 되겠는가? 저녁을 잘 먹으면 살로 가니까 점심을 잘 먹고 하루 종일 걸으며 운동할 계획이다. 평균 만 오천 보에서 이만 보 정도 걷고 있다.


가랑비 내리는 미로의 도시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동서남북 방향도 모른 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호텔을 나왔다. 골목길이 너무 복잡하다. 하물며 내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 호텔도 명색이 4성급인데 미로 속 손바닥 만한 플라자에 자리잡고 있다. 호텔을 나선 뒤 돌아오는 길도 걱정이다. 헤맬 것이 분명하다.


가랑비와 함께 바람도 세차다. 나는 현재 서 있는 곳을 좌표로 설정하고 동서남북을 대충 가늠한다. 그러나 백팩 메고 우산 들고 카메라 목에 건 자세에서 지도 펴는 것이 성가시다. 할 수 없이 육감을 이용하여 대로를 찾아 걸어 나간다. 드디어 대로에 나왔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이고 차가운 바람에 비가 오는데 당연히 길에 사람이 많이 보일 리가 없다. 황량하다. 그래도 호텔이 있는 미로의 골목길을 벗어났다.


아내는 비를 좋아한다. 창가에 앉아 비 오는 것을 보면 좋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비만 오면 밖으로 나가서 걷자고 한다. 지금도 나는 비가 와서 불편한데 아내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다행이다.


카페에서 아이들을 추억하다


우중에 찬 바람 불고 사람 많지 않은 거리를 방향 없이 헤매다 코끝이 시릴 즈음 카페에 들어와 커피 한잔하며 서울에 있는 아이들을 추억했다. 딸과 몇 개월 전 결혼한 아들 내외.


부모 여행 간다고 적지 않은 용돈도 보태 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칠순 여행도 아니고 결혼 40 주년 핑계 삼아 하는 여행이다. 성의로 받기는 했지만 내가 비용을 책임지는 것이 옳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돌려주라' 고 말했다. 우선 자식들이 직장 생활하며 어렵게 번 돈을 내가 여행경비로 쓴다는 것이 마음에 불편하다. 아내가 동의했다. 성의로 반은 받고 반은 적당한 계기를 활용해 돌려주겠다고 한다.


특히 새아기는 나이도 가장 어린데 우리 가족으로 들어와 익숙하지 않은 시부모에게 적응하느라 심리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가면 익숙해지겠지만 그렇다고 친부모만 하겠는가? 그래서 또 애잔하다.


커피 마시다 문득 생각나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갑자기 만난 플라자 마욜(Plaza Mayor) 광장


스페인 도시는 전통적으로 플라자 마욜(Plaza Mayor)이라고 부르는 중심광장이 있다. 대체적으로 사각형 형태의 광장인데 정부 청사가 한 면을 차지하고 그 앞 면에는 성당이 나머지 양면에는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다.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지형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명칭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이 플라자 마욜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과거에는 모든 길이 플라자 마욜과 연결되는 구조였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플라자 마욜에서 멀어질수록 외곽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도 마찬가지다.


돋보기를 써도 골목이 미로같이 얽혀 있고 지표명 글씨가 작아 좌표를 찾을 수가 없다. 지도를 접고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앞에 갑자기 플라자 마욜이 나타난다. 광장 명칭을 보고 인식한 것이 아니고 규모와 형태를 보니 알겠다. 네모난 광장에 동서남북 방향으로 길이 나있다. 크지는 않다. 그런데 성당이 없다. 그래서 지도를 보니 대성당은 해변에 위치해 있다. 어젯 밤 공항에서 들어올 때 해변가에 고딕식 첨탑이 조명을 받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플라자 마욜 입구 오른편 귀퉁이에 버거 킹 가게가 보인다. 플라자 마욜 광장 입구에 미국 햄버거 가게가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위치가 기가 막히다.


가랑비 속 해변과 아름다운 대성당


햇살 좋고 푸른 하늘의 날씨였다면 좋았을 풍경이다. 우중의 풍경 사진이란 아무래도 우중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툭 터진 바다와 야자수가 여행객의 마음에 평안과 우수를 함께 선물한다. 또 흐린 날씨에 황토색 건물의 색깔이 참 독특하다.


가랑비가 조용하게 내리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사진을 몇 컷 찍는다. 풍경은 꼭 아름다운 그림 이어야 하는가? 그 시각에 만들어진 풍경도 그 나름대로 분위기를 품고 있어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며 그 분위기를 다시 느끼면 되는 거지.


대성당은 말 그대로 대성당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조그만 섬 해변에 왜 이렇게 큰 성당을 지었을까? 역사 자료를 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조망을 해보면 해안을 따라 성채가 지어졌고 그 안쪽에 대성당이 있다. 그리고 플라자 마욜은 대성당에서 1킬로미터 내륙에 있다.


대성당 아래 해변 도로가 아름답다. 아내는 마요르카 있는 동안 대성당 아래 해변 도로를 매일 산책하자고 한다. 나도 당연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걸으면서 보고 느끼고 먹자고 하는 것이다. 정처 없이 걷다가 다리 아프면 쉬어가고 배고프면 카페 들어가 요기하며 우리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 살아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래서 골목길도 방향 없이 걷고 가게들도 기웃거리며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중국 음식점 주인의 친절


처음에는 어디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인테르모달(Intermodal) 종합터미널 건너편 광장 모퉁이이다. 중국 음식점이 보였다. 일요일이라 식당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아서 점심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식당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아내가 국물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스페인 식 국물 요리인 칼도(Caldo)가 있는 식당을 찾고 있었다. 다행이다.


전식은 맵고 신맛이 있는 수프(Sopa de Agripicante)와 완탕 수프(Sopa de Wanton)를 시키고 본식은 볶음밥과 쇠고기 야채 스튜 요리를 시켜 나눠 먹었다. 우중에 찬 바람맞으며 돌아다니다 따뜻한 수프를 먹고 나니 이윽고 아내 얼굴이 붉어진다. 중국 음식점에 잘 들어왔다. 후식을 먹고 나니 음식점 젊은 주인이 중국 차 마시겠느냐고 물어 온다. 내가 멈칫하자 알아차리고 ‘레 인비토(Le invito)’하고 말한다. 자기가 대접하겠다는 뜻이다.


따뜻한 중국 차를 작은 컵에 담아 오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한 참 뒤 보기 좋은 도자기 주전자에 차를 내온다. 알맞게 따끈하다. 잘 우려진 중국차를 따라 마시니 입안과 목구멍에 남아있던 음식의 잔해들이 다 씻겨 내려간 듯 개운한 느낌을 준다. 또 따끈한 차가 식도를 따라 위까지 내려가면서 주는 따뜻한 쾌감도 좋다.


객지에서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중국 음식점 식당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오면서 차 값에 해당하는 충분한 팁을 남겨 놓고 나왔다.


마요르카에서 진주 쇼핑


아내가 스페인에서 사려고 하는 쇼핑 대상물은 구두와 마요르카 진주다. 마요르카에서 자연산 원료를 사용해 제조한 품질 좋은 진주가 나온다. 아내는 이미 스페인에 살 때 목걸이와 팔찌 등 필요한 몇 가지를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중에 구시가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곳곳에 진주 파는 가게가 보인다. 아내의 눈은 당연하게 가게 윈도에 박혀 있다. 내가 골목 사진 찍다가 돌아보면 아내가 안 보인다. 두세 군데 가게를 들어가 보면 그곳에서 진주 목걸이나 팔찌 등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 가격 정보를 머리에 입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 달이면 지하철 공짜 노인이 된다고 기다리면서 뭐가 그렇게 가지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절대 자기 것을 사지 않는다고 말한다. 딸이나 새아기 것을 산다고 한다. 구두도 그렇다. 그런데 구두는 아내와 딸이 같은 사이즈를 신는다.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고 알 수 없다. 헷갈린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아낀다고 더 부자가 될 일도 없고 그 반대로 산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더 가난해 지지도 않을 것인데. 생각해 보면 나나 아내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뭐 그렇게 길다고.


매 순간을 만족하며 편하게 살면 되는 거지 하는 생각.. 젊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평생 경계해왔던 것은 아내가 나이 들어서 젊었을 때 못해 본 것에 대해 푸념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되돌아 갈 수 없는데 아내의 푸념 듣는 것은 싫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무엇을 원하면 바로 현장에서 해결하는 버릇이 있다. 바로 해결하는 것이 어려우면 시간을 두고 반드시 해결한다. 그렇다고 잠재적인 불만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 입장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아내는 결국 연한 핑크색 진주 팔찌 하나 샀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딸 손에 맞겠네' 하고 말한다. 내 경험상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팔찌는 장롱 서랍 속 어디엔가에 처 박힐 것이다. 일년에 두 세번 차질까? 카드로 지불하고 면세서류를 챙겼다. 날도 어두워져 생수 한 병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속으로 '오늘 하나 건졌다' 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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