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동네 한 바퀴를 돈 후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쪽으로 발걸음을옮겼다. 순간 나도모르게부리나케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에서 신호등 버튼을 찾다 말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인데... 한국에 왔는데도 횡단보도가 가까워지면 서두르게 된다.버튼을 누르기 위해 발걸음을재촉한다.
미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신호등 버튼을 누르던 게 버릇이 되었나 보다고 말하며 남편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겨우 보름미국에있었으면서 티를 너무 낸다며남편이놀렸다.그러면서 남편도 사실은 버튼을누르려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다리면 신호등이 자동적으로 바뀌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버튼을 눌러야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뀐다. 딸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마운틴뷰는 전철이 없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시여서사람들이 주로 자동차로 이동한다. 걸어 다니는사람을 잘 볼 수가없다. 보행자가 별로 없으니버튼을 누를 때만 신호등이바뀌는 게 타당해 보였다. 어쩌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안 되는 사람을 위해 신호등을주기적으로바꾸기보다는 지금처럼필요할 때만바꾸는 게 효율적이라는생각이 들었다.
이번미국에 머무르면서는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횡단보도를 건넜다.딸•사위가 마우이섬에지각 신혼여행을 가있는 동안 손녀를 봐주면서주로걸어서집 주위를맴돌았기 때문이다.
우선 아침에 손녀를 프리스쿨에 데려다줄 때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데려올 때 세 번씩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남편은 손녀가 탄 유모차를 뒤에서 밀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손녀랑 옆에서 노닥거리다가 횡단보도가 가까워 오면 얼른 뛰어가 기둥에 있는 버튼을 누르는 역할을 맡았다. 달려가서 빨리 버튼을 눌러야만 빨리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다. 프리스쿨에 데려다 줄 때는 서둘러야 되지만 집으로 데려올 때는 느긋해도 되는데 걸음은 똑같이 빨라진다.
손녀가 프리스쿨에 있는 낮동안 남편과 나는 동네를 걸어 다녔다. 집들도 보고 집 앞에 있는 조그만 정원들도 구경했다. 나무, 꽃, 장식품 등을제각각 독특하게꾸민정원들을 보며 집주인들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의 나래도펴보았다.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 보았다. 손녀가 아직은 27개월 아기지만 어쩌면 훗날이 학교에 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학교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살폈다. 동네 어귀를 돌자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신호등 버튼을 누르면단순 명령어"기다려!"(Wait!)로 무뚝뚝하게응답한다.Please를 붙여 상냥하게 "기다리세요!"(Please wait!)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횡단보도 신호등 버튼 (출처: hazel)
조금 후 '하얀 점선 사람'이걸어가는 모습이 신호등에 뜨면우리도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횡단보도 신호등 (출처: 구글)
프리스쿨에 가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손녀를 인근 공원과 초등학교에 데리고 갔다.돌잡이때도 공을 제일 먼저 잡았던손녀는요즘도공 차는 것을무척 좋아한다. 작은공원은 바로 집 앞에 있지만, 너른 운동장이 있어 공차기에 좋은초등학교는 횡단보도를 여러 번 건너야 갈 수 있다. 횡단보도가 나오면나는유모차를 앞질러 버튼을 누르는 내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좀 더 멀리 있는 시내에 갈 때는 횡단보도가 더 많아 눌러야 할 버튼이 더 많았다. 점심을 먹으러 일본 국숫집, 베트남 식당이나In-N-Out 버거집에 갈 때도,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갈 때도, 아니면 식료품을 사러세이프웨이(Safeway)마트에 갈 때도 여러 번 횡단보도를 건너야했다. 손녀 없이 걸을 때는 유모차를 밀지 않는 남편이 버튼을 누르는 경우도 있지만습관적으로 내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물론손녀랑 같이 갈 때는유모차를 미는 것은 남편 몫이고 버튼 누르는 것은내 몫이다.버튼 누르기는 이번미국 여행에서 내 일로 확고하게 자리를잡았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와서까지 신호등버튼을 누르는 역할을 수행하려고 횡단보도 앞 기둥을 기웃대는 나자신이어이가 없어 웃음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