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의자

by 기혜선

우리 집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앉을 법한 작은 나무 의자가 언제부터 우리 집 베란다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자의 용도는 다양했다. 베란다 벽장에서 커다란 대야를 꺼낼 때, 지금은 사라진 베란다 밖 난간에 올려진 장독이나 화분을 옮길 때, 창밖 빨랫대에 걸린 빨래가 손에 닿지 않을 때, 키가 작은 할머니는 자주 그 의자 위에 올라섰다. 그러다 우리가 장난 삼아 의자에 올라서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위험하다"라고 소리치곤 하셨다. 그 흰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던 자리도, 바로 그 의자였다.

우리는 그 의자를 '할머니 의자'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자주 베란다 가운데에 그 의자를 두고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엄마가 바깥일을 시작한 뒤로는 우리 삼 남매를 기다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째 이렇게 늦었대. 다른 애들은 다 오더만. 실내화 주머니는 왜 질질 끌고 와."

할머니는 내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가방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내가 어떻게 걸어왔는지를, 할머니는 늘 알고 계셨다. 2층이던 집이 4층이 되고, 23층이 되었다가 13층이 되기도 했지만, 작은 의자의 자리는 늘 그랬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 한가운데 그 자리는 태어난 증손주를 기다리는 자리이기도 했고, 외출이 힘들어진 할머니가 세상을 만나는 창이기도 했다.

“우리 강아지 아장아장 걸어왔는가?”

“저 사람은 늦었는갑다. 엄청 뛰네.”

“아파트 장섰네. 저기는 뭘 팔길래 저렇게 줄을 섰대?”

할머니의 어깨는 점점 작아졌고, 의자는 어느새 할머니 몸에 꼭 맞는 맞춤 의자가 되었다.


할머니는 떠나고, 의자는 남았다.

나는 가끔 그 낡은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따뜻한 볕과 바람, 혼잣말처럼 건네던 말씨, 그리고 묵묵히 시간을 견디던 그 자세까지.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자리는 어떻게 기억될까.

이제는 할머니도, 의자도 곁에 없지만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마치 그 자리처럼,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기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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