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간다.

by 기혜선

"세명이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매표소 부스 안이 좁아 보이는 백인 여자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쏟아내며 열쇠 세 개를 내밀었다.

"열쇠가 입장권인가 봐."

나는 아이들을 향해 돌아서며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는 아이들과 따뜻한 나라에서 조금 지내고 오겠다고 선언했다. 중학교 1학년을 막 마친 큰아이와 초등학교 6학년을 앞둔 작은 아이만 데리고 무작정 뉴질랜드로 날아왔다. 대자연에 감탄하며 며칠을 보내고 오클랜드 시내 투어를 나온 중이었다. 시내의 명소에서 제법 시간을 보낸 우리는 구글 맵에서 추천하는 한국식 치킨을 먹을 계획이었다.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호기롭게 날아왔지만 며칠을 못 참고 가장 먼저 그리워진 것은 입맛이었다.

그런데 그 치킨가게는 조리방식만 한국식이 아니라 가게 운영 방식도 한국식을 고수하는 듯 새벽같이 여는 오클랜드의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오후 오픈 시간이 명시되어 있었다. 구글맵에 쓰인 오픈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혹시나 모른다며 가게 앞에 당도해 보니 역시나 가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오픈 시간까지 무얼 할까 하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미로 체험관이었다. 흡사 우리나라 방탈출처럼 보였지만 몇 개의 컨테이너 박스를 연결해 광장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었다. 커다란 플랜카드에 관심이 생긴 우리는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티켓팅까지 한 것이었다. 열쇠를 받아 든 우리를 보고 입구에 서있던 젊은 남자가 손짓을 했다.


조립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육중한 철문을 열자 깜깜한 복도가 펼쳐졌다. 평소 겁이 많은 큰아이가 "무서워"라며 뒷걸음질 쳤다. 사실 나도 '괜히 한다고 했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중이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 "괜찮아, 여기만 지나면 될 거야. "하고 호기롭게 아이 둘을 잡아끌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깜깜한 복도를 지나자 여러 개의 문이 나왔다. 우리는 그중 하나의 문을 열어야 했다. 갈라져서 각자 가기에는 우리는 겁이 많았고, 동네는 낯설었다.


우리는 여러 갈림길을 만났고, 그중 하나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는 늘 두려웠고 문 안은 매번 새로웠다. 물론 나타나는 모든 방이 아름답거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깜짝 놀랐고, 빨리 도망쳐 나오기도 했으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이제 그만 끝내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육중한 문을 밀고 나오니 예상치 못한 바깥세상이 펼쳐졌다. 출구에 서있던 안내직원이 "congratulation"이라고 말했다.


흔히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미로 속에서 갈림길을 선택하고 열어야 할 문을 고르 듯이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과연 선택만일까. 선택에 수반되는 '열기(open)"의 순간이 진정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는 것은 행동이자 시작이다. 선택이 행위가 되고, 삶이 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기고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여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열고 나의 길을 여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무언가를 여는 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미로의 육중한 문을 열고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깜깜한 복도를 걸어 들어가 듯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것들을 열고 한발 내딛는 것이 인생 아닐까.


나의 삶은 작은 열쇠 꾸러미 같았다. 어떤 문은 거침없이 열렸지만 어떤 문은 한참을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맞는 열쇠를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열려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 닫힌 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원하는 것은 절대 얻을 수 없음을 안다. 나는 오늘 또 새로운 문을 열었다. 이 문이 나를 어디로 닿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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