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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Sep 21. 2020

볼링핀

지구로부터 수천 광년 떨어진 한 행성의 지적생명체에 관한 보고

지구로부터 수천 광년 떨어진 성계의 한 행성에,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성계는 학계에 이미 보고된 별과 행성이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찾아가 이들을 만나려고 할 수 있으므로, 어디인지는 비밀로 해두어야 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구로부터 빛의 속도로 3천 년을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인데,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요.


이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 지적인 외계 생명체들은, 생긴 것이 새하얗고 미끈하며, 감각기관들은 인간으로 치면 머리로 볼 수 있는 몸의 위쪽에 몰려 있으며, 인간으로 따지면 몸통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불룩하게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볼링핀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아주 편하실 겁니다. 실제로도 볼링핀과 옆에 두고 보면 크기나 외모가 크게 다르게 생기지 않았으므로, 편의상 이 외계 행성의 지적 생명체들을 "볼링핀"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목부분에 있는 줄까지도,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고 하네요.

볼링핀들은, 인류와 마찬가지로, 이제 갓 본인의 성계를 무인탐사할 정도의 지능을 가졌습니다. 인류의 역사처럼, 그들의 역사도 꽤 오랜 시간동안 전쟁으로 얼룩졌고, 지금도 일부 종족들은 전쟁상태에 있지만, 지금은 대체로 큰 규모의 전쟁은 잦아들었다는군요.


볼링핀들과 그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지구 생명체들처럼 유성생식을 합니다. 지구의 생명체와 다른 점은, 이들 볼링핀은 세 가지의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볼링핀들의 성별은, 볼링핀의 목부분에 있는 띠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띠는 검은색, 빨간색 아니면 하얀색의 세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검은목 볼링핀은 빨간목이나 하얀목 볼링핀과 교접생식할 수 있고, 빨간목 볼링핀은 검은목이나 하얀목과 교접생식을 할 수 있다는군요. 하얀목 볼링핀 역시 검은목과 빨간목 볼링핀과 교접생식을 할 수 있고요.


그들의 교접방식은 목에 있는 색깔의 띠를 서로 보여주다가 세 번 그 띠를 서로 부딪히는 것으로 완료됩니다. 이때 띄게 새겨져 있던 유전정보는 빨간목으로부터 검은목이나 하얀목, 검은목으로부터 하얀목 볼링핀으로 가는 순서대로 전달되고, 이때 전달된 유전정보를 받은 개체는 이후 지구시간으로 약 6개월이 지난 뒤, 새로운 개체를 복제하게 됩니다.


볼링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만족감을 위해 교접을 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가끔 같은 목 볼링핀끼리 교접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다만 같은 목 볼링핀끼리 교접하여도 특별히 유전정보가 이전되지는 않습니다. 일부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볼링핀 사회에서는, 같은 목 볼링핀끼리의 교접을 엄청난 죄악인 것처럼  탄압하기도 하며, 심지어 검은목 볼링핀끼리 교접했다고 하여 사형에 처하는 집단도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사실, 이런 같은 목 볼링핀끼리의 교접행위가 볼링핀의 사회에 무슨 영향을 끼치지는 않아요. 대체로 특정 색깔의 볼링핀 위주의 사회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고 싶어하는 집단일수록 그런 성향이 강하다고 하다네요.


이런 세 가지 성별의 볼링핀 사이에서는 놀랍게도 성별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데, 두 가지 성으로부터 모두 유전정보를 받을 수 있는 하얀 목 볼링핀이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받습니다. 심지어 일부 볼링핀 집단 중에는, 하얀목 볼링핀을 아예 가둬놓거나 외부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집단들도 남아있다고 하네요. 아마도 다른 발전된 성계의 외계인 사회연구학자들이 보면, “영양학적인 이득을 위해, 유전정보의 무분별한 확산을 방지할 수단이 하얀목 볼링핀에 대한 비이성적 차별밖에 없었던, 고대 미개했던 볼링핀 사회의 구조가 남겨버린, 아주 저능하고 미개한 전통이 남아있는 탓”이라는 학설로 설명할겁니다. 볼링핀들의 과학기술이 꽤 빠르게 발전한 것에 비해, 여전히 그 미개한 차별의 개선 속도는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는게 아주 이상하기는 해요.  


눈치채셨겠지만, 대부분의 볼링핀 사회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사회적인 차별을 받지 않아 왔던 빨간목 볼링핀인데, 많은 집단에서 최근 이러한 빨간목 볼링핀의 권력독점 현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그들의 성계를 무인탐사하는 지금까지도 빨간목 볼링핀의 권력독점 현상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어요. 그들 행성 전체 볼링핀의 숫자에서 빨간목이 차지하는 비율은 3분의 1 정도인데도, 인간이 이들 볼링핀과 처음 조우하게 되면, 그 볼링핀의 목은 분명 빨간목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들도 일정 규모의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통 통신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의 사회도 씨족 집단 규모에서 지금은 전체 대륙을 지배하는 몇 개의 “국가유사” 사회로 발전해왔습니다. 인간들의 국가와 약간 다른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예를 들어, 국가의 경계는 지리적인 경계보다는, 볼링핀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몸짓의 유형으로 구분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어쨌든 이들 사회를 편의상 국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들 국가 사이에도 예전에 엄청난 반목이 있어왔는데, 주로 이들 국가 볼링핀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볼링핀의 매끈한 정도였습니다. 항성의 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지역의 국가에 살고 있는 볼링핀들은 대체로 겉이 매끈하고, 그렇지 않고 추운 지역의 국가에 살고 있는 볼링핀들은 대체로 겉이 까칠한 편이었거든요. 하지만, 물론 이런 차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인간이 보기에는 그냥 별 차이 없는 볼링핀으로 보일 뿐이고, 그들 간에 어떤 지적, 신체적 능력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볼링핀들 사이에는 볼링핀의 매끈한 정도에 따라 서로를 차별하는 전통도 있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를 찰폐하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고대부터 지속된 이러한 차별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그들 국가 내부의 정치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하네요.


볼링핀 국가들 중 가장 발전한 강대국은, 이런 볼링핀의 매끈한 차이나, 볼링핀의 목줄의 색깔, 혹은 그들의 교접습관들 중 어떤 것으로도 차별을 두지 않고, 그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그 구성원들이 고민하고 싸워 온 국가라고 하네요. 어쩌면 당연한 결과기도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볼링핀이 자신의 꿈을 이루게 북돋아주는 국가여야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정말 창의적인 혁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우주 외계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 볼링핀은 아직도 본인들끼리 차별을 두고 있는 무척 미개한 종족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언젠가는 깨닫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본인들은 수많은 생명체들 중 하나인 볼링핀일 뿐, 빨간목이든 하얀목이든 검은목이든 자신들간에 차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누구와 목띠를 세 번 부딪히던지, 그들 피부가 얼마나 매끄럽던지 간에, 그것들이 개인의 능력을 제한할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차별을 멈추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도 믿어요.


그 날이 오면, 그제야 볼링핀들은, 모든 볼링핀 구성원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발전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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