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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Jan 06. 2022

말의 시대에 글을 추억하다.

가벼운 말의 시대에 수줍은 글의 침묵

인류 역사 이래로,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소통 수단이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말’은 휘발성이 있는, 양방향의 소통 수단이었다. 그에 반해 독자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글’은, 일방향의 소통 수단이었다. 그래서, 말과 글은 사회에서 그 의미가 달랐고, 권력의 층위도 달랐다.

‘글’은 권력자의 수단이었다. 한자나 라틴어로 쓰인 글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국민들을 구속하는 권력의 칼이었다. 그에 반해, 오랜 기간 ‘말’들은 업신여겨졌다. 한글이 말을 기반으로 한 글이라는 이유로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업신여겨진 역사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래서, 오래도록 엄숙했던 ‘글의 시대’는 분명 바뀌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 십 년간 스마트폰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유튜브는, ‘말’을 일방향의 소통수단으로 바꾸고 있고, 카카오톡은 ‘글’을 양방향의 소통수단으로 바꾸고 있다. 말과 글의 권력성이 해체되어 간다. 아니, 해체가 모자라, 오히려 널리 전파되는 유튜브의 ‘말’이 카톡의 ‘글’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져가고 있다.

한 때 그 존재 자체로도 큰 권력을 가졌던 활자 신문은, 유튜브의 뉴스로 대체되어 간다. 중국의 메신저 앱에서는, 사람들이 글씨보다 말소리를 녹음하여 전달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스마트폰의 축복을 받은 ‘말’이 드디어 전파력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좀 더 쉬운 의사소통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무하는 ‘말’들의 무게는, 전파속도만큼이나 가벼워지고 있다. 사람들의 감정을 더욱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은, 사건에 대한 더욱 극단적인 감정들도 함께 실어 나른다.


말과는 달리, ‘글’은 예전부터도 감정을 실어 나르는 데에는 서툴렀다. 마치, 투박한 경상도 사내가 좋아한다는 고백의 말도 내뱉지 못하고 얼굴만 빨개지듯, 글은 그렇게 감정을 내뱉는 것이 서툴다.


이 시끄러운 말의 시대에 닿자, 고백을 내뱉지 못하는 글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소설 한 켠의 표현이 가져오는 심상이 어떤 것인지, 책을 읽다가 덮고서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은, 무척 별스런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외로운 저녁들은, 넷플릭스와 유튜브 속 수많은 ‘말’들을 이리저리 부유한다.


글의 시대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글의 시대에 자란 나도, 이제 이렇게 급격히 다가온 말의 시대에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나의 ‘, ‘ 조금은  닮았으면 좋겠다. 사건의 무게를 알기에 감정을 싣지 않았던 신문기사들, 인스타그램만큼 자세히 보여주지 않아도 서로의 일상을 조각씩 숨겨두었던 동아리 잡기장, 그리고, 행여 너무 부담될까 꾹꾹 조심스레 눌러쓴 흔적의 연애편지들을, 그렇게 나의 말이 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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