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을 이야기할 때 함께 생각해야 할 상처들
멸공.
공산주의자들을 멸한다는 이야기이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북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로 널리 쓰였다. 기억하기로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도 멸공이라는 단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멸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 단어가 가진 의미에 대한 큰 고민을 해보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멸공의 역사에는 북한의 침략을 막은 자랑스러운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권들은,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을 탄압하기 위해,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을 억지로 씌우기도 했다. 그래서, 멸공의 역사에는 슬픈 이야기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쌀을 줘가며 가입시켰던 보도연맹에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중에는 오히려 학살당했던 양민들이 그랬다. (보도연맹 사건). 또, 빨갱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진 제주도와 광주의 무고한 국민들도, 멸공의 이름 아래에서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도 4.3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스스로의 아픈 역사를 진단하지 않는 사회라면, 애초에 치료를 받아서 건강해질 수가 없다. 역사의 과오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회라면, 그 사회야 말로 완전무결한 지도자를 모시고 산다고 세뇌당한 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모습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멸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역사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몰려 희생된 이들의 역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어렸을 때의 검정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았던 역사라고 하여,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이 나라에는, “빨갱이”라는 거짓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삶이 망가져버린 사람들과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상처 입은 가족들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또 투표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멸공이라는 말의 상흔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수출 기업을 책임질만한 균형있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인가, 혹은 한 나라를 운영할만한 역사관이 있는 사람들인가. 한국 역사의 아픈 부분까지 마주하고, 앞으로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일까.
유권자들과 소비자들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