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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Mar 31. 2022

나는 좀 불편해도 괜찮다.

장애인 시위와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대하여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동안 매 주말 도심은 태극기 부대의 차지였다. 주말 광화문과 서울역에는 태극기가 항상 나부꼈고, 멸공의 깃발이 붉은색으로 나부끼는 기이한 형태의 그 시위는 몇 년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태극기 부대의 주장들이나 사실인식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시위권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다. 특히,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많은 어르신들의 표정에는, 그들이 젊은 시절 가져보지 못한 시위의 자유를 만끽한다는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나와는 의견이 다른 그들이지만, 그들도 이제 선진국이 된 그들의 나라에서 자유로이 정치적인 주장을 할 기회를 비로소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시위들로 인해 정말 많은 '불편함' 있었다. 주말에 도심에 급한 일이 있어 나가려고 하면, 버스나 택시라는 이동수단을 아예 포기해야 했고, 가까운 청계천에서 내려서 걸어가거나 혹은 지하철역을 지나쳐서 다시 걸어오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불편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 헌법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런데, ‘시위’라는 것의 법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그렇게 ‘불편함’으로써 사람들이 주목을 하게 만드는 것도 시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시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시위”란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도로, 광장, 공원 등 일반인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우리나라 법은 평화롭게 손뼉 치고 공원에 모이는 것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위력을 보여서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제압을 가하는 행위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 충돌의 과정이 사상의 결과를 낳는 정도의 테러라면 물론 방지해야 하겠지만, 폭력에 이르지 않는 정도의 위력을 행사하여 대중의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도 우리 법상 보호되는 시위의 한 형태라는 말이다. 원래부터 민주사회는 그렇게 늘 시끄럽고, 많은 이해관계들이 자유로이 충돌하게 마련이다.


피라미드형 전체주의로 유명한 몇몇 나라들에서는 그런 시위들이 자유로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런 전체주의 나라들은 한국과 같은 민주국가들을 비웃기도 한다. 저 나라들은 혼란스럽다고. 저런 불편함을 야기하는 시위들이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하지만, 가끔은 과격해 보이는 민주사회의 그 혼란이 바로 소수자의 명제들을 일반인들에게 드러내는 매우 효과적인 힘이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는 시끄러워도, 전체주의 사회보다 훨씬 더 큰 확장력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여당이 될 당의 이준석 대표가, 한 장애인 단체의 시위에 대하여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비문명적 방식”이라는 취지로 표현했다. 몇 년간 태극기 부대의 시위가 조용한 탑골공원이나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강공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광화문 네거리와 서울역 광장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런 시위에 대해서도 이준석 대표가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도 그 장애인 단체가 적법한 사전신고를 통해 시위를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그 단체가 처벌을 감수했다는 것은, 그들의 요구사항이 절박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테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통해서야, 장애인들이 겨우 생존권적 문제를 이슈화 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이제 와서야 한두 정치인들의 사과라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우리와 정치권은 이준석 대표의 표현대로 “선량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아울러 평소에는 그들의 요구에 무심한 사람들이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불편을 야기하는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국가 보조금이 많이 가는 것도 납세자에게는 불편함이고, 태극기 부대의 시위에 저지당해서, 혹은 어떤 선거운동이 도심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 제 때 갈 수 없는 것도 시민들에게는 불편함이다.


그런데, 장애인과 같은 어떤 소수자들은 그런 종류보다 훨씬 절박한, 생존에 직결되는 이동권과 관련된 불편함을 매일매일 느끼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이동이 늦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직장을 아예 구하지 못하는, 혹은 인간 생활을 매일 포기해야 하는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한두 정치인의 사과라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정도의 ‘불편한’ 시위에서야 가능했다.


이런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선량한 시민”의 불편함을 강조하며, 절박한 소수자들을 “선량하지 못한 시민”으로 일단 구분하고 보는 미래 여당 대표의 인식을 보니, 시위 없고 불편함 없는 깨끗한 전체주의 사회를 꿈꾸는 어떤 나라의 독재자들이 연상된다.


그런 구분은 분명 정치인들의 입장에서야 통치하기 쉬운 방식이고, 다수의 표를 얻기 쉬운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에 대한 배려 없이 수학적으로 다수의 표를 얻는 방법만을 찾아간다면, 정치가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다수의 불편함을 이유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일이야, 왕정 때에도 하던 수준의 정치일 뿐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본인이 아무리 다수자라 하더라도 소수자에 대해 입장을 이입해 볼 수 있고, 그래서 결국 화합을 이끌어 내는 배려와 소통능력이다. 그런데,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 단체의 시위 방식이 불편하다고 분노하는 만큼,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서도 힘썼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왜 우리가 당선되니까 이러냐’는 수준의 투정이 그의 주장 근거라는 사실이 비참해진다.  


소수자에 대한 찰나의 분노를 이용해 쉽게 인기를 얻은 정치인들이 만든 국가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체첸에 대한 분노와 유대인에 대한 분노는, 그런 전체주의 국가를 기어코 투표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내지 않던가.


새 정권이 곧 시작하는 지금, 자칫 우리가 그런 사회로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제발 나의 기우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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