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팜므파탈 누아르라는 장르가 있다.
보통 주인공인 수사관이 치명적인 여성 용의자를 만나는데, 대체로 그 치명적인 여성 용의자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남자 수사관의 눈을 멀게 하고 유유히 법망을 피해 간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비극으로 끝나는데, 수사관이 “붕괴”하는 류의 결말이 많다. <원초적 본능>이나 <LA컨피덴셜>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영화겠다.
그런 류의 이야기들과 반대의 스토리도 있는데, 성녀(聖女)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에서 성녀는 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팜므파탈의 이야기와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둘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함께 자주 소비된다.
<헤어질 결심>은 이 중, 어떤 이야기일까? 죽음을 몰고 다니는 여성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팜므파탈 장르물의 화법이다. 영화 속 서래의 남편들은, 그녀의 계획대로 하나하나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주인공 해준에게도 그녀는 팜므파탈일까? 서래는, 팜므파탈의 이야기와 달리 오히려 해준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팜므파탈이라는 주인공의 판단은 오해라는 것이 곧 판명된다. 그녀는 주인공을 ‘붕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팜므파탈이 아니며, 오히려 그녀가 결코 정의롭지 못한 남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이유도,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성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고 팜므파탈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 작위적인 구분이 애초에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남성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여성을 규정하는 게 과연 정당한가? 아니,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아니라도, 나의 편향된 시각(한자로는 편견이겠다)에 근거하여, 다른 누군가를 단정하는 게 상대에게 정당한 일일까?
영화는 끊임없이 이 이야기는 우리의 더럽혀진 시각에 관한 이야기임을 은유한다. 벌레가 낀 눈, 인공눈물로 씻어야 하는 시각..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서래가 떠나버린 바닷가의 거친 파도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파도를 이겨서래를 다시 찾고 싶어 하는 듯한 해준의 모습도 오래 응시한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삼켜버리는 그 커다란 파도 앞에 선 해준의 모습은 힘없고, 나약할 뿐이다. 그는 인생에서 놓쳐버린 사람을 찾아, 이길 수 없는 파도를 헤맨다.
그녀를 거대한 파도에 묻어버린 것은, 흐려진 우리의 시각일 테다. 어쩌면 누구나 그렇게 각자의 왜곡된 시선으로 묻어버린, 이제 인생에서 다시 찾을 수 없는 인연들도 있을 테다.
그들이 사라져 버린 바닷가의 풍경은, 거친 인생만큼이나 매몰차다. 그렇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바다를 힘없이 바라보면서 체념하는 것도, 편견에 묻어버린 아름다운 그들과 슬프게 ‘헤어질 결심’을 하는 한 방법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