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선생님 수제자의 회상
"네가 형석이구나."
처음 만난 대동학원 조 선생님의 인상은 푸근한 아저씨 같았다. 조 선생님은 조금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계셨다. 처음 와보는 '학원'이라는 곳의 분위기에 조금은 주눅 들어 있던 나는, 조 선생님의 밝은 인사에 긴장이 누그러졌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그때가 내가 학원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다닌 때였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심 내가 영어에서 뒤처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권유한 학원이 대동학원이었고, 그마저도 당신의 걱정 때문에 아이를 먼 학원을 보내는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어머니는 영어 한 과목만 가르치는 하루 한 시간짜리 "단과반" 강의만 추천하셨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갈 곳도 없던 터라, 어머니 말씀에 순순히 따라서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단과반은 학원비도 싸서 3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조 선생님이 가르치는 "영어 단과반"은 수강생이 나 말고는 다른 한 명 밖에 없었다. 아마도, 대동학원에서는 여러 과목을 한 번에 결제하는 "종합반"수업이 훨씬 인기가 많아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조 선생님의 영어 강의는 조촐한 2:1 수업이 되어버렸다.
다른 한 명의 학생은, 머리가 길고 항상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조 선생님이 가끔 질문을 해도 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학원을 처음 다니는 나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여학생과 나는 함께 학원을 다니는 한 달여 동안 서로 전혀 말을 섞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3주째 되던 날, 그 여자아이가 학원을 그만두었다고 조 선생님이 나에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너와 나만 수업하게 되었어. 네가 만약 수업을 더 받기 싫다고 하면, 그만두어도 되고, 아니라면 남은 한 달을 선생님과 너 둘이서 계속 수업을 할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조 선생님은 무척 공손하게 이야기했지만, 내심 내가 학원 수강을 취소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원의 생리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알리 없는 나는, 나까지 수강을 취소한다면 조 선생님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조 선생님의 수업이 무척 졸려웠다. 하지만 그때 나는, 수강생이 떨어져 나간 선생님의 자존심을 살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강의가 좋다고, 그래서 계속 강의를 듣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조 선생님은 내 이야기에 조금은 놀란 듯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나하고 남은 한 달 동안 계속 수업해 보자."
그리고, 조 선생님은 칠판에서 내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짚어주며 영어를 가르쳐주시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 선생님은 그 엄격했던 영문법의 시대에, 좀 더 자유롭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했었다. 지금처럼 회화 위주의 교육은 아니었지만, 3 형식 문구와 4 형식 문구를 일러주면서도 꼭 현실에서는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3 형식으로 쓸 때 전치사 to를 써야 하는 동사 몇 개는 외워두자면서 give send hand pass bring을 노래처럼 외우게 하고는, 다음날 잘 외우는 나에게 "Good boy"라고 칭찬하면서 환하게 웃기도 하셔서, 나는 내심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조 선생님의 유일한 수강생인 나는, 다른 학생들과의 비교를 당하지도 않고 조 선생님의 수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영어도 점점 재미있게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난 사실, 시나리오 작가야.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만드는 일을 하거든."
"그러면, 선생님은 선생님이 직업이 아니세요?"
"지금은 선생님이지. 그런데, 낮에 너희가 학교에 가 있을 때는 나는 시나리오를 써."
"와 어떤 내용이에요?"
"음. 말로 하기에는 좀 어려운 이야기야."
선생님이 말로 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는 어떤 종류일까 궁금했지만, 말을 잘 듣는 조 선생님의 수제자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대동학원은 항상 아이들로 북적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인기가 있는 종합반을 수강했었고, 그래서 다른 교실들은 모두 학생들로 가득했다. 가끔 종합반에서, 학생들의 웃음소리나 선생님의 호통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 선생님과 나의 단과반 영어 교실은 조곤조곤한 가르침만이 머물렀다.
그렇게 두 달의 강의가 끝나고, 어느새 나도 영어에 대한 조금의 감각을 익혀가고 있었다. 다음 수강 시즌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다시 조 선생님의 같은 강의를 찾아 수강했는데, 선생님의 사진은, 시간표가 그려진 대동학원 팸플릿에서 제일 마지막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강의가 시작되었고, 조 선생님의 수강생은 겨우 두 명 더 늘어났다. 다른 두 명도 말수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고, 종합반을 다니는 아이들만큼 의욕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조 선생님께 먼저 영어를 배우고 있는 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 같아,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다.
조 선생님의 두 번째 강의가 끝날 무렵, 선생님은 나와 두 명의 다른 학생들에게, 다음 달부터는 수업을 할 수 없다고 아쉬운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너희한테 수업을 하면서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어. 그런데, 그게 이번에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되어서, 많이 바빠질 것 같아. 그래서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떤 드라마인지 물어보았지만, SBS에서 하는 드라마라, 부산에서는 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조 선생님은 이야기했다. (당시는 SBS 채널을 지방에서 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조 선생님의 표정은 늘 밝았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는 표정이 기쁨인지, 혹은 슬픔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조 선생님은 예의 그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영어는 결국 사람과 이야기하는 도구야. 너희도 혹시 영어를 사용하게 될 일이 있으면,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렴"
그리고, 조 선생님은 세명의 수강생들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당신의 한 때 유일한 제자이자 수제자였던 내 눈을 꽤 오래 쳐다본 것으로 기억한다.
조 선생님이 학원을 그만 둔 이후에, 나도 더 이상 대동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가끔 조 선생님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이 될리는 없었다. 아마도, 조 선생님은 그렇게 서울로 상경해서, 그가 쓴 좋은 시나리오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중학생 1학년짜리에게 설명해 주기 어려웠던 그 드라마는, 어쩌면 각박한 세상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와, 그런 어려운 현실에 매몰되어도 여전히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조 선생님의 수제자는, 꽤 공부를 잘해 변호사가 되었고, 외국회사의 사내변호사로 취직해서 업무상 영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 3 형식 문구를 쓸 때면, 조 선생님께 배운, give send hand pass bring의 멜로디가 입에 맴돌아 꼭 to를 붙여 내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