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극단적인 증폭
술에 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낯선 바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거하게 술자리를 가진 뒤, 일행과 헤어져서 나 혼자 이 바에 혼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한 중년의 남성이 내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는 조금은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인간의 힘은 정말 대단해요. 인정합니다. 우리가 인간들을 극단적인 사상들로 내몰아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을 때에도, 인간들은 결국에는 이성을 찾더라고요."
이 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 힘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실험이 성공하나 싶은 때도 많았어요. 2차 세계대전이 그랬고, 또 냉전시절이 그랬었어요. 참, 사실 종교적 극단주의도 저희가 잘 쓰는 방법이랍니다. 웃기지 않아요? 모든 종교는 악마를 배척하는데, 그 종교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오히려 악마인 저희가 할 일을 종교가 대신해 주더라 말입니다."
그는 선홍빛 칵테일 잔을 들고 입을 적시며, 캬 소리를 내었다. 그의 입에서 비릿한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잠깐, 악마요? 당신이 악마란 말인가요?"
술기운에도 처음 보는 남자의 이야기가 하도 이상해서, 나는 남자의 말을 끊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내 이야기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결국 발전하고, 또 서로 토론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시대가 오자, 우리가 인간에게 완전히 져버리나 싶었어요. 그 이야기도 너무 긴데.."
도대체 이 낯선 남자와 나는 어디서 만난 것일까?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어지러운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지금 내 머리에는 어마어마하게 마신 술로 인해 머리가 아프다는 느낌만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분명 처음 보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인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내 반응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중간중간 머리가 아파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남자는 나를 곁눈질로 살펴볼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 중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니, 이 남자는 스스로를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악마는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단다.
전제군주 시절의 잔혹한 황금기도 자신이 만들어 내었으며, 인간의 서로에 대한 모든 편견도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 그런 것들이 득세를 할 즈음에는 결국 악마가 영원히 이길 것 같은 사건들도 이어졌다. 종교전쟁, 전체주의, 세계대전,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까지. 하지만, 그의 말에 다르면, 결국 인간은 토론을 하기 시작했고,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때 악마는 더 이상 인간을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할 단계까지 왔었단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있어요. 인류는 가장 위험한 소통수단을 만들어 냈어요. "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만지작 거리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고칠 필요가 없는 소통 수단이죠. 인간은 자신들의 생각을 양 극단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이런 멋진 소통수단을 만들어 냈다니까요. 이 빨간 버튼 보이시죠?"
남자는 갑자기 나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그가 가르친 곳에는 유튜브의 아이콘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튜브는 1 정도의 강도를 가진 편견이 가득한 영상을 본 시청자들에게 2 정도의 강도의 편견을 추천해 줍니다. 종국에는 10 정도의 편견까지도 소비하게 만들죠. 이 얼마나 멋진 발명품인가요?"
그가 몇 번의 클릭으로 보여준 영상에는, 그를 닮은 한 남자가 외국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상 속 남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인종이며 결국 우리를 모두 말살해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과거에는 자신과 다르게 생긴 것을 싫어하는 본성은 이해해요. 과거에는 그런 것을 위험요소로 파악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겠죠. 선사시대 정도에는 생존을 위해 그랬을까 싶지만, 수많은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현대에까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왜 혼동하는지, 인간들은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죠. 자신의 본성에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 않을 정도로 게을러요. 그런 게으름을 우리가 이용하면,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무척 편하답니다.”
그는 다시 선홍빛 칵테일을 한 모금했다. 그리고는 입을 쩝쩝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예컨대, 얼마 전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건강보험 수급을 1조 원 정도 받았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어요. 그때, 한국인들 사이에 엄청난 공분이 있었어요. 외국인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발언이 인터넷을 휩쓸었고, 심지어 지금 대통령이 선거에서 '숟가락만 놓는 외국인 건강보험'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외국인들은 한국 보험공단에 오히려 공여를 더 많이 하고 있더란 겁니다. 내국인들의 건강보험은 2조 원 넘게 적자인데, 외국인들의 건강보험은 공단이 오히려 외국인들로부터 5000억 원을 더 벌어들이고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는 전혀 소비되지 않아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 화면을 조작하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게으른 혐오는 유튜브로 증폭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팩트체크를 찾아보지 않아요. 다만, 자신의 분노를 극대화하기 위해 잘 디자인된 유튜브가 추천해주는 더 극단적인 영상만 소비할 뿐이에요. 그래서 거꾸로 더 극단적이 영상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유튜브는 악마에겐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죠."
그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는데, 그 웃음소리가 머리를 부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에 화가 나서, 온몸에 힘을 짜내어서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처음으로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내 눈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나른하고 텅빈 웃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유튜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한 번 두고 보죠."
그가 손에 쥔 휴대폰에서는, 한 남자의 시끄러운 선거 유세 동영상 소리가 시끄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