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에게 약속받고 싶은 것.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나와 W, S 세 명의 술자리는 S의 집으로 옮겨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알코올이 진하게 빚어낸 진지한 농담과 쾌활한 진담이 오고 가는 시간이 시작된다. 하릴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중에, 셋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 없는 친구 도경이의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도경이는 따지고 보면 우리를 서로 알게 해 준 녀석이다.
이 자리에 없는 도경이가 S와 어떻게 친해졌는지의 이야기. 그리고, 나는 도경이와 어떻게 만났었는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런 내가 결국 도경이를 통해 S와 친해지고, 내 친구였던 W와 S를 서로 알게 해 준 이야기. S는 도경이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도경이가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하고 맞장구를 친다. 도경이가 서울에 올라와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도 같이 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에, 막내 W는 요즘에 서울에서 혼자서 지내다 보니 좀 힘들 때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W가 혼자 집에 들어오면, 멍하게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고. 나와 S도, W처럼 역시 서울에서 혼자 사는 게 쉽지 않다고 격하게 공감한다. 고향을 떠난 세 명의 부산 남자들은,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이 아직 무섭다.
그리고, 술에 거하게 취한 나는 W와 S에게 이야기한다.
"야 니들이 힘들면 나한테 꼭 연락해야 해, 미친놈들아. 새벽 두시건 세시건, 어쨌든 그런 때 있잖아?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렇게 불쑥 전화하면 실례가 안되나 싶은 때. 그럴 때에는 꼭 나한테 연락해 알았지?"
"고마워요. 형들도 힘들면 나한테 이야기해요."
막내 W도 배시시 웃으면서 대꾸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던 S가 약간 꼬인 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근데, 나는 진짜 도경이가 그렇게 떠나기 전에, 나한테 이틀 전에 전화한 게 아직도 생각이 나. 내가 그때 도경이한테 좀 더 이야기를 했더라면 걔가 안 떠났을까 싶어서."
그렇게 10년째 들었던 S의 자책에는, 또 10년째 해온 나의 만류가 따라온다.
"뭐라는 거야. 도경이 가기 이틀 전 연락 가지고 또 자책하지 말고, 너 책임 전혀 아니야."
도경이의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S의 시뻘게진 눈이 아직 내 기억에 남아있어서 잠깐 먹먹하다.
"여하튼 너희들은 꼭 갑자기 이 세상 하직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도 나한테 12시간 전에 전화해서 '이 세상 하직할 것 같아요.' 하고 이야기하고 가야 해. 도경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가지 말고. 안 그러면 나 부조 안 할 거야"
객기 어린 내 취중 농담에 막내 W가 웃으면서 묻는다.
"12시간 전에 전화하면 형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러면 나는 니들 있는 데로 가서 36시간 동안 같이 있어 줄 거야."
우하하 하고 웃음이 터진다. 혀가 꼬일 대로 꼬인 S 가 낄낄거리며 이야기했다.
"너 때문에 이 세상 하직 못하겠다 야. 그래도 고맙네."
"빈말 아니고 진짜야. 니들이 언제든지 연락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라도 하고 누우면, 그래도 좀 잠자리가 편할 거야. 나는 새벽 세시 반 네시에 니들 전화가 울려도 받을 테니까, 그럴 때에는 일단 나한테 전화해. 그리고 세상 떠나기 12시간 전에도 꼭 전화로 먼저 연락 주기로 약속해. 얼른."
기어이 나는 비틀거리며 기어가 S와 W의 손도장을 찍어 받아내고야 만다. S와 W의 약속을 받아낸 서울의 밤은 약간 시원한 밤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다.
뭐가 바빴는지 그렇게 서둘러 떠난, 그리운 도경이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고 싶다.
너를 보내던 날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약속한 대로, 우리는 널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외로움에 사무쳐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어느 밤에는, '꼭 괜찮으니 힘들 때에는 우리를 믿고 연락해달라'는 그 약속의 손도장을, 10년 전, 너한테 먼저 받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래도 그렇게 소중한 너를 잃었던 기억은 너무 가슴 아파서, 우리가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했으니, 우리는 너를 추억하며 더 오래오래 함께 지내보겠다고. 꼭 지켜봐 달라고 말이다.
* 9월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