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나

Driver(13회)

by 이은호



차미혜의 고향 모습은 정말 멋졌다.

적어도 바다에서 보이는 섬의 모습에서는 말이다. 망망 바다에 떠 있는 봉우리 두 개.. 하나는 크고 하나는 조금 작고...

두 개의 섬은 점점이 이어질 듯 붙어있었고 주변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많이 솟아있었다.


"훌륭하네요~! 미혜 씨의 고향 풍경이..."

"그래요? 전 별로지만.. 어쨌든 고맙네요. 칭찬을 해주시니..."

"저도 이렇게 훌륭한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아주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거든요."

"어쩌면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몰라요. 때로는 고향에 가슴 아픈 기억을 묻어둔 사람들도 있거든요."


배가 포구로 접어들면서 포구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롭고 한적한 모습이었다.

저런 곳에서 만사를 모두 잊고 한동안 살아봤으면...

늘 무엇엔가 쫓기듯 운전대를 잡고 바쁘게 살아온 한성수로서는 평화롭게 다가서는 마을 풍경이 너무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어머니의 품속처럼...


"저기 저 바위 좀 보세요."

차미혜가 한성수를 슬쩍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요? 뭐가 있나요?"

한성수가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모양이 비슷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하나는 바닷가 쪽에 하나는 좀 더 위쪽으로 걸려 있었다.

"무슨 모양으로 보이세요?"

"글쎄요.. 그냥 커다란 바위인데요?"

"잘 봤네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 바위를 남매바위라고 불러요."

"그래요? 그리고 보니까 모양이 비슷한 게 그럴듯하네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그렇겠지요?!"




아주 오랜 옛날.. 이 섬은 무인도였다고 한다.

뭍의 어느 마을에 사는 부부가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이 섬에 닿았다.

배는 다 망가지고 뭍으로 돌아갈 길이 없었던 부부는 두 개의 섬 중 큰 쪽 섬에 정착하여 새 삶을 시작하였고.. 밤낮으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어느덧 열 달이 차고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남녀 쌍둥이를 낳고 말았다. 당시에는 남녀 쌍둥이를 낳으면 필시 한 아이에게 커다란 불행이 찾아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부는 고민 끝에 한 아이를 포기하기로 하였고 남편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여자아이를 버리기로 하였다.


아내는 남편의 손에서 아이를 빼앗아.. 스스로 악역을 맡기로 하고.. 여자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차마 아이를 없앨 수가 없었고 대신에 아이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아이를 광주리에 담아서 건너편 작은 섬에 갖다 버렸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그들 부부의 아들이 18세가 되었다.

하루는 아들이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건너편 작은 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게 아닌가?

"저 섬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이후 아들은 몇 번 그러한 연기를 더 관찰하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어머니가 절대로 건너 섬에는 가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가볼 생각은 못하고 호기심만 잔뜩 키우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아들은 커가면서 가끔씩 이상하게 끓어오르는 맘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밤바다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건너편 섬 중턱쯤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마침 바닷물이 많이 빠져 두 섬 사이엔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아들은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건너편 섬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불빛은 얼기설기 엉성하게 지은 작은 움막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들은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거기엔 신기하게도 자기 나이 또래의 여자애가 홀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 웬 여자애가 있을까?!"

아들은 의아해하며 눈을 크게 뜨고 여자애를 살펴보았다.

은은한 불빛에 비친 여자애의 몸은 신비로웠다. 이미 클 것은 다 큰 성숙한 몸이 엉성한 옷가지 사이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여태껏 이성으로서의 여자를 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은 거적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애가 눈을 뜨고 쳐다보고는 흠칫 놀라며 몸을 도사렸다.

"안녕하세요? 이곳에 혼자 사시나요?"

"..."

아들이 겨우 입을 열었지만 여자애는 말이 없었다.

대신에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들의 여기저기를 더듬는 여자애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들은 여자애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손을 맞잡고 바닷가로 내려왔다.


바닷가 언덕 위에 걸터앉은 그들은 바닷바람을 쐬며 철썩이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보름달의 은은한 빛이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수컷과 암컷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 그리고 그들은 한참 끓어오르는 방년 18세였다.


이윽고 그들의 몸이 하나가 되는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을 맞은 그들은 언덕 아래로 굴렀고 하나는 바다로 떨어져.. 둘 다 바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 저렇게 그냥 덩그러니 서있는 바위에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군요."

한성수는 남매바위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다음부터 이 섬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면 한 명을 뭍으로 보낸데요."

"그.. 그렇군요."

"그 뒤로 그들 어부 부부는 다시 자식을 낳고 이 섬에서 계속 살았데요."

"그러면 이 섬의 사람들은 모두 그 어부 부부의 자손인가요?"

"호호~ 그런 건 아니구요 나중에 뭍에서 사람들이 이주를 왔다고 해요."


배는 어느덧 선착장에 닿았고.. 한성수와 차미혜는 사람들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양손에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성수를 따르며 차미혜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언덕 위에 산장이 있거든요. 거기로 가실래요?"

"그러죠 뭐.. 저야 어차피 미혜 씨를 따라야 할 몸이니까요!"

"예? 저를 따른다구요?! 듣고 보니 말이 좀 그런데요? 여필종부(女必從夫)가 아니라 남필종부(男必從婦)란 말씀이죠?"

"남필종부요? 우리가 벌써 그런 사인가요? 하하하~"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산장에 짐을 풀고.. 차미혜는 고향집에 다녀온다며 한성수를 혼자 두고 나갔다.

하기야 모처럼 만에 내려오는 고향집에 아무 관계도 아닌 그와 함께 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저는 그동안 짐 정리하고 산책이나 하고 있을게요."

한성수는 일 나가는 아내를 배웅하는 남편처럼 바이바이 손을 흔들었다.


방으로 들어온 한성수는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말은 짐 정리며 산책이며 얘기했지만 그는 정리할 짐도 없었고 남자인 자기가 미혜 씨의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뒤적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뒤적이다가 민망한 것이라도 나오면 어쩔 것인가?

그리고 사실 밤새 뜬눈으로 꼬박 지새운 탓에 산책할 정신도 아니었다. 그대로 잠시라도 죽었다 깨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찌르르 찌르르~ 매미소리가 장단 맞춰 들려오는 게 자장가론 그만이었다.



ZZz~ ZZzz~

얼마 동안이나 죽어있었던 것일까?! 한성수는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방바닥은 자신이 흘린 침으로 흥건했고 윗도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리고 어떤 넘이 그랬는지.. 창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한성수는 저려오는 다리를 절며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창밖은 이미 어두워지려는 폼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밥 달라는 신호를 연신 보내고 있었다.

"미혜 씨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따라붙었어야 했는데 잘못했나?"

한성수는 그녀와 떨어져 늘 그녀 걱정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앞으론 미혜 씨 곁에 딱 붙어서.. 수호천사 노릇을 제대로 해야지!"


그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찬물을 거의 반통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덕분에 갈증도 풀리고 정신도 확 들었을 뿐만 아니라 꼬르륵 거리던 뱃속도 진정되었다.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였다.


한성수는 벽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거울을 쳐다보았다.

무슨 용도인지는 몰라도 조그만 방에 비해 거울은 엄청나게 컸다. 두 사람의 전신이 충분히 비칠만한 크기였다.

"읔~!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이람! ㅋㅋ"


거울 한복판에는 부스스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낯선 사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짜식 며칠 사이에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군!"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군청색 모자엔 빨간색 글씨로 '운수대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은 지난번 회사에서 근로자의 날 기념품으로 나눠준 모자였다.


한성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따라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아까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 야영장이 보였고.. 거기엔 울긋불긋 원색의 텐트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켜지는 텐트의 불빛 사이로 반라의 청춘들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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