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모래사장까지 터덜터덜 내려간 한성수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왜냐고? 앞에 망망대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거기엔 타고 갈 배도 없을뿐더러 그는 헤엄도 못 치는 주제였다.
막상 앞으로 나갈 길을 잃은 한성수는 비로소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게걸음을 쳤다.
주위엔 청춘남녀들이 듬성듬성 앉아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철없는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하였다.
한성수는 뚤레뚤레 주위를 살피다가 그래도 분위기가 제일 좋아 보이는 한 남녀 커플의 옆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2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외모가 훤칠한 젊은 녀석과.. 조금 어린 듯한 탱글탱글 물 오른 젊은 처자가.. 소라와 고동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음.. 그림이 좋군~! 요즘 젊은 처자들 술을 곧잘 한단 말이야!"
한성수는.. 술잔을 쪽~ 비우고 소라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서 오물오물 맛있게 씹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군침을 꼴깍 삼키며 쳐다보았다.
"쟤들에 비하면 난 참으로 인생을 헛살았군! 저 나이 때 나는 배곯아가며 최루탄에 맞서서 노동운동에 앞장섰는데 말이야~!"
한성수는 젊은 시절 그 투쟁의 대가로 변변한 직장에서 쫓겨났고 이렇게 택시 드라이버로 삶이 바뀌었던 것이었다.
차라리 그때 쏟았던 그 열정과 노력을 한때 자신을 따라다니던.. 미선 영자 선주 중 한 명에게 집중했더라면 지금쯤 애가 서넛은 될 텐데 하며.. 한성수는 가물가물한 얼굴을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저씨 한잔 하실래요?"
옆자리의 그 훤칠한 청년이 한성수에게 말을 붙여왔다.
그 청년은.. 애인과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운수대통' 말도 안 되는 로고를 단 모자를 눌러쓴 꼭 마을 건달 같은 작자가 자꾸 힐끗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게 영 맘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얼른 술 한잔 주고 쫓아버리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아님 이런 곳에 혼자 찌그러져 남들이 먹고 노는 걸 보고 기웃거리는 한성수가 불쌍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고...
"예? 아예~ 그럼 고맙죠!"
한성수는 얼떨결에 잔을 받아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빈 잔을 청년에게 건넸다.
"자.. 한잔 받으세요."
청년이 술잔을 받으며 나무젓가락을 한성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 좀 잡숴보세요. 오늘 우리가 직접 잡았거든요."
"그래요?! 이렇게나 많이??"
한성수는 접시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소라며 고동이 그들이 이곳에서 직접 잡은 것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한성수가 소라를 한 점 집어서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꿀맛이었다.
그는 한 점을 더 집어서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 입에서 절로 녹았다.
"근데 이걸 어디서 잡았지요?"
"조~기 앞에서요. 이런 거 무지 많거든요. 한 시간 정도면 이만큼 돼요~!"
청년은 신이 나서 팔을 활짝 벌리고 침을 튀기며 말했고.. 한성수는 파편을 피해 얼른 뒤로 물러나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안 되겠군! 나도 내일은 그녀와 소라도 잡고 고동도 잡아서 오붓하게 한잔 해야지..."^^*
한성수는 청년에게서 소주 몇 잔을 더 받아먹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한잔씩 따라 줄 때마다 빨리 좀 안 가나 하는 그들의 눈치를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기와는 달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을 끈질기게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차미혜의 행방을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던 것이다.
"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술 잘 마셨습니다~!"
"버.. 벌써 가시려구요?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한성수의 말 한마디에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고 옆의 처자는 미소가 번졌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두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을까?!
한성수는 마을 쪽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빈속에 몇 잔 들이켠 소주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치 이동을 하며 속을 짜르르~ 울려왔다.
"도대체 미혜 씨는 어디로 간 거야?! 왜 안 오는 거야??"
걱정 반 원망 반으로 그녀를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저 앞에 한 여자가 조그만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차림은 눈에 익은 듯했다.
10여 미터 정도로 간격이 좁혀졌을 즈음 그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성수 씨! 어디 가세요?"
"예?!"
바로 그녀.. 차미혜가 한성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 미혜 씨!"
그는 차미혜의 얼굴과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여자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어?! 그.. 그래..."
얼떨떨해하는 한성수를 쳐다보는 차미혜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딸이에요!"
하룻만에 그는 그녀에게서 믿을 수 없는 말을 두 번씩이나 들었다.
"저랑 같이 여행하실래요?"
"제 딸이에요!"
이렇게 노총각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이 또 있을까?
처음의 말은 너무나 달콤했었다.
그러나 나중의 것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하늘이 무너지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일이...ㅠㅠ
한성수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럼 결혼을 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여행을 하자고 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말세라지만.. 그토록 청순 우아 고상하게 보이는 그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럼 혹시.. 그 뺨에 칼자국이 남편이 아닐까?!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워 복수한답시고 맞바람 작전을 쓰는 건 아닐까?! 공교롭게도 상대는.. 쉬워 보이는 한성수 자신이고...
"..으..."
한성수의 이맛살이 찌푸려지고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뺨에 칼자국의 음산한 표정과 깍두기들의 덩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러다 칼침이라도 맞는 거 아닐까?!"
한성수는 갑자기 옆구리가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옆구리로 손을 가져갔다.
"한성수 씨 무얼 그렇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는 그의 소매를 차미혜가 흔들었다.
"아 예.. 얘가 미혜 씨 따님이라는데 놀라서..."
"그래요?"
"전.. 미혜 씨가 결혼한 줄 몰랐거든요.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한성수는 불평하듯 내뱉었다.
"언제 물어보셨나요? 먼저 자진해서 꼬치꼬치 신상을 얘기하기도 그렇고..."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긴 그렇긴 하네요."
그들은 천천히 산장을 향해서 발걸음을 떼었다.
차미혜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걷고 한성수는 혼자서 뚝 떨어져서 걷고.. 그와 그녀의 사이엔 바닷바람이 휑하니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시장하지 않으세요?"
잠시 후 그녀가 입을 떼었다.
아 그럼 당연히 배고프지! 남녀가 같이 여행 와서 남자 혼자 몰래 밥 먹었겠냐?! 궁상맞게 이런 곳에서 혼자서?
한성수는 따지듯이 대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찮아요.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그러지 말고 같이 식사하러 가요~! 같이 식사하려고 부지런히 오는 길이거든요."
"엄마~ 나도 배고파!"
옆에 그녀의 딸도 한 마디 했다.
"그래~ 알았어! 한성수 씨 식사하러 가요. 제가 맛있는 곳을 알거든요."
"..."
아이가 배고프다는데 어찌하랴! 한성수는 고개를 떨구고 그녀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횟집이었다. 모 조그만 섬마을에 횟집 말고는 그럴듯한 음식점이 있겠는가?
"여기 해물탕 맛이 괜찮거든요! 해물탕 괜찮으시죠?"
그 집은 횟감 말고 해물탕도 준비가 되는 모양이었다.
"..."
한성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아저씨! 여기 해물탕 하고 식사 좀 주세요."
그녀가 식사 주문을 하였다.
"먼저 소주 한 병 갖다 주시구요~."
한성수가 술을 주문하였다.
한성수는 먼저 그녀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 숨에 한잔을 쭉~ 들이켜고는 다시 잔을 채웠다.
술을 들이켜는 그의 모습을 그녀의 딸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이름이 모니?"
한성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태까지 그녀의 딸 이름도 묻질 않았다. 순간적인 충격에 얼이 빠져서...
"김영은이요."
"오.. 영은이! 이름이 예쁘구나!"
"오영은이 아니고 김영은요!!"
"그래그래~ 알았다. 김영은!!!
"근데..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내.. 이름?!"
영은의 당돌한 질문에 한성수는 잠시 멈칫했다.
"어른 이름을 함부로 묻는 게 아니야!"
차미혜가 딸아이에게 한 마디 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이름을 물었고 영은이가 대답을 했으니 저도 당연히 제 이름을 알려주어야지요."
"영은아! 내 이름은 한성수란다."
"성수요? 우리 옆집 아이 이름이 성순데... 걔 나한테 맨날 얻어맞는데..."
"영은아!!"
차미혜가 옆에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 그래? 하지만 아저씨는 쌈 잘하는데..."
한성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영은이 한성수보다 한 수 위로 보였다.
"영은이는 몇 살인데?"
"일곱 살이요!"
"오.. 그럼 내년에 초등학교엘 들어가겠구나!"
"예! 엄마가 서울에 데리고 가서 학교 보내준댔어요!"
"와~ 정말? 좋겠구나!"
"이제 엄마랑 같이 살 거예요!"
차미혜를 바라보는 영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입가에 미소가 잡혔다.
그런 영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차미혜의 손길과.. 영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영락없는 엄마의 그것이었다.
영은이는 차미혜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