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넷... 스물셋 스물넷...
한성수는 산장의 툇마루에 누워 손가락을 치켜들고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하나씩 가리키며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언제 이렇게 많은 별을 보았던가?! 그가 언제 이렇게 별 헤는 밤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한성수는 가물가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았지만.. 생각이 나질 않았.. 아.. 아니다! 사실은 두어 번 있었다.
고교시절 불량 친구들과 싸돌아다니며 망나니 짓을 하던 시절.. 어쩌면 그 친구들이 불량한 자신과 어울려 개망나니 짓을 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그 여학생과 뒷동산엘 올랐었다.
그날 그는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별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옆의 그 여학생에만 열중하여.. 별이 많았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었다.
별이 많았던 그날 밤.. 몽롱했던 순간 자신의 눈앞에도 별이 몇 개 반짝였었다.
또 다른 기억 하나는 군에서 초병으로 밤을 새울 때의 기억이다.
원래 개망나니로 놀던 넘이 군에 가면 사람 된다는 말이 있다. 한성수가 딱 그 짝이었다.
군에서는 투정을 받아줄 사람도 없고 돈 없고 백 없는 그를 편하게 놀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냥 주어진 임무 충실히 잘 수행하면 하루 세끼 짬밥 먹여주고 그렇지 않으면 호된 기합이 주어질 뿐이었다.
한동안의 고문관 시절을 보낸 후 한성수는 정신을 차렸고 다음부터는 모범적인 사병이 되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하고 까라면 까는...
덕분에 배 곯지 않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짬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초병의 주 임무는 '전방주시'이다.
따라서 임무에 충실한 한성수는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다만 전방만 주시할 뿐!!
그러던 추운 초겨울의 어느 날 밤.. 그날도 그는 열심히 전방주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방 저 앞 몇 군데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불길이 활활 타올라 옆으로 길게 띠를 지어 꾸물꾸물 이쪽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른바.. 적의 '화공작전'이었다.
북쪽에서 불을 놓으면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타고 일 년 내내 빼곡하게 자라난 비무장지대의 갈대숲이 남쪽으로 타 내려오는 것이었다. (주, 이렇게 다 태워 놓으면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져 경계근무를 서기 용이하다)
불길과 더불어 마치 폭죽이 터지듯 땅속에 매설해 놓은 혹은 6.25 때 하늘에서 쏟아부었던 지뢰들이 연방 터져 올랐다.
꽝! 꽝! 소리도 요란하게...
그날 밤하늘은 아주 청명했고 엄청난 수의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뻘건 대지와 까만 밤하늘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
하지만 그는 밤하늘의 별을 그냥 한번 쳐다봤을 뿐.. 이내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전방주시만 하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님 별을 헤다가 최면이라도 걸렸는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나락의 저편으로 떨어지는 순간!
한성수는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살며시 앉는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바람에 실려 부드럽고 향긋한 기운이 콧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누.. 굴.. 까?! 환영인 듯 어렴풋한 얼굴의 윤곽을 느끼면서.. 그의 정신은 나락의 저편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한성수는 차미혜와 조그만 언덕 위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 떠있고 언덕 아래로는 시커먼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는 망나니 시절.. 한 여학생에게 했던 짓거리를 떠올리며 옆의 차미혜를 바라보았다.
꾸울꺽~!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빠알간 입술을 쳐다보며 그가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얼굴이.. 그때 그날 밤의 여학생 얼굴로 바뀌었다. (사실 그 여학생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느낌이 그랬다.)
그와 그녀의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눔들~ 게 섰거라!!!"
둘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 빰에 칼자국이 시퍼렇게 날이 선 회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우~왁!!
한성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발은 사정없이 달달달 떨렸고.. 옆구리가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고는.. 발아래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둘이는 한참 동안이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 와중에 한성수는 중심을 잡는답시고 허공에서 연신 발버둥을 쳤다.
이윽고 바닥이 환해지면서 눈앞에 빛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뻘건 불길이었다.
불길 사이 중간중간에 폭죽이 하늘로 치솟고.. 하늘에선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니 발아래 반짝반짝 별들이 빛나고.. 하늘에서 불길이 쏟아져 내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 아주 큰 폭죽이 터지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는데.. 불꽃이 빙빙 돌더니 그들을 가둬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이는 꼼짝 못 하고 불길이 이글거리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성수는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살며시 뜨고 소리 나는 쪽으로 주위를 기울였다. 거기엔 남녀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힘을 주어 눈에 초점을 맞추자 흐릿했던 영상이 망막에 또렷하게 맺혔다.
여자는.. 그녀.. 차미혜고... 남자는.. 앗!!
한성수는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같이 있는 남자..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뺨에 칼자국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직 혼수상태에서 덜 깨어났나?!"
한성수는 자신의 허벅지를 슬쩍 꼬집어 보았다.
"아얏!" 아팠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넘도 이 섬으로 왔단 말인가? 우리가 이 섬에 온 걸 어떻게 알고?!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에 한성수의 가슴은 답답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꿈속에서 본 시퍼런 회칼을 생각하며 떨고 있었다.
"저 넘의 기습에 대비해서 단단히 준비해야겠는데..."
한성수는 여차하면 튈 생각으로.. 한쪽 다리를 세우고 한쪽 다리는 툇마루 밑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실눈을 뜨고 그들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사내는 한성수의 기대를 저버리고 산장 밖으로 그냥 조용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차미혜는 몸을 돌려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성수 씨! 그만 일어나세요. 들어가셔서 주무셔야죠!"
그녀가 가까이 와서 자는 체하고 있는 한성수를 가만히 흔들었다.
"옆에 누워보세요. 누워서 보는 밤하늘이 참 좋네요~!"
한성수는 짐짓 태연한 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잠시 한성수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와 머리를 맞대고 반대편으로 누웠다.
"와~! 별이 진짜 많네요!! 저렇게 많은 별은 저도 오랜만에 봐요."
"별이 마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죠? 미혜 씨는 혹시 점찍어 둔 별이 있나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거요?"
"하하~ 우리도 한번 유치하게 별을 세어볼까요?"
"호호~ 좋아요!"
한성수가 팔을 쳐들어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키며 하나씩 세었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왜 스물다섯부터지요?"
"스물넷까지는 제가 아까 세었거든요."
"아~ 예! 그러셨군요."
"...설흔아홉 마흔... 아이고~ 제 한계를 벗어나네요..."
한성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 섬의 밤하늘엔 별들이 너무 많았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은 그 넘이 그 넘 같아서.. 도저히 센 넘인지 안 센 넘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한성수 씨! 내일 아침 일찍 이 섬을 떠나야겠어요."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죠? 오자마자 갑자기?!"
한성수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녀의 머릿결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찾아올 것 같아요."
"그 사람이라뇨?!"
"왜 있잖아요! 차로 뒤를 쫓던..."
"근데 그 사람이 어떻게 이곳으로 올 거라고 생각하시죠?"
"아까 그 사람의 형님을 만났거든요."
"형님이라뇨?! 아까 미혜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말입니까?"
"아! 보셨군요. 예 그래요. 차로 우리 뒤를 쫓던 그 사람과 쌍둥이 형님이죠."
"그래요?!"
그랬었다.
한성수가 빰에 칼자국인줄 알고 깜짝 놀랐던 사람은 바로 쌍둥이 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혜 씨! 먼저부터 궁금했었는데.. 그 사람과 미혜 씨는 어떤 관계지요? 별다른 이유 없이 그가 뒤를 쫓고 미혜 씨가 피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예..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다음에 말씀드리죠."
그녀는 그 길로 입을 꼭 다물었다.
가시를 감춘 장미처럼.. 때론 차가운 그녀의 성격을 몇 번 경험한 그로서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궁금증은 엄청났지만 그녀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그 자리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별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