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둘

Driver(16회)

by 이은호



저쪽에서 천천히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통영 여객선터미널과 이 섬을 하루 두 편씩 잇는 여객선!

그들은 지금 저 배를 타고 이 섬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선착장 옆 건물 모퉁이에 숨어 그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면 한성수와 차미혜 그리고 영은이를 말한다.

한성수처럼 식구가 빨리 늘은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루 만에 여자가 그리고 또 하루 만에 일곱 살이나 먹은 아이가 생겼으니...

것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 아니다! 차미혜는 자신이 따라나선 것이니까.. 그 그럼.. 자신이 늘어난 식구인 셈인가?!


한성수는 그녀의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차미혜는 영은이의 옷가방을 손에 들고 들어오는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영은이는 한 손에 곰 인형을 들고.. 한 손으로는 차미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남들이 볼라치면 그들은 영락없는 한 가족이었다.

알록달록 카멜레온 가족!

어쩌면 한성수는 대박이 터졌는지도 몰랐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다'는 말과 같이.. 일가친척 없는 혈혈단신인 그가.. 졸지에 예쁜 아내(?)와 과년한 딸(?)까지 거느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한성수는 그녀와 영은이를 쓱 쳐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영은이는 영 못마땅하다는 듯 째려보고 있었다.


스스로가 대견해하며 미소를 짓던 한성수는 문득 정신이 든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애당초 혼자 살기로 작정했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아.. 요즘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해지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녀랑 확 살아버려?! 불장난을 저질러봐?

하기야 뭐 자신이 손해 볼 일도 아니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그녀를 얻음으로 해서.. 다 키워놓은 딸까지 덤으로 얻게 되니 큰 수고를 더는 게 아닌가!

안 그러면 40이 다 되도록 아니 40이 넘도록 기저귀 갈아 줄 아이나 있을지 모를 처지인데 말이다.


그가 하루 밤 사이에 이렇게 까지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얻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지난밤 그와 그녀가 영은이가 잠든 틈을 타서 뭔(?) 일을 했다거나.. 장래에 대해서 무슨 약속을 주고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느낌이란 게 있지 않은가! 거기에 덧붙여 지난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섬마을에 한 소녀가 살았다.

그녀는 너무도 곱고 예뻐서 섬마을 남자애들의 가슴을 몹시도 설레게 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바닷가 길을 따라 걸어갈라치면 그 뒤로 남자애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따라붙곤 하였다.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더 빨리 성(性)에 눈뜨는 경우가 있었다. 원래 성이라는 게 인간의 본능이 아니던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게다가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시골에는 남의 눈을 가려줄 호젓한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 소녀의 뒤를 침을 질질 흘리며 따라붙는 늑대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먹이는 하나에 늑대는 여러 마리!

서로서로의 견제에.. 그 소녀마저도 결코 녹녹지는 않았으니.. 기회가 올 듯 말 듯 늑대들은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다 그 소녀는 뭍으로 훌쩍 유학을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에 늑대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먹이를 놓쳤다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우워워워워~~~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날 밤.. 늑대들이 전부 모여 회의를.. 아니 우두머리를 뽑는 힘겨루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새 우두머리가 탄생하였으니.. 이름하여 점백이 늑대! 짜자잔~!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며 점백이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우워워워워~~~


추운 겨울이 오고.. 방학이 되고.. 유학 갔던 그 소녀가 돌아왔다.

뭍의 좋은 물을 많이 먹어서일까?! 이미 그 소녀는 소녀가 아니었다. 한층 세련된 이미지에 이미 다 커버린 처녀가 되어있었다.

꾸~울~꺽!


점백이는 그녀에게 대시를 하였다. 물론 그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 마을이 눈으로 하얗게 덮인.. 바람도 세차게 불던 어느 겨울밤에..녀는 소중한 순결을 잃고 말았다.

하얀 눈 위에 점점이 남았던 점백이의 발자국까지.. 계속 쌓이는 눈과 세찬 바람이 모두 덮어버리고 말았다.


한번 깃발을 꽂았으면 그곳이 자기 점령지라고 생각하는 우직한 점백이는.. 그 후 몇 번 더 공격을 감행했고 몇 번 더 성공하였다.


점백이의 대단한 번식력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배가 불러왔다.

착하기만 한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혼자서 고민을 했으나.. 점점 불러오는 배를 점백이가 눈치를 채게 됐고.. 중간에 다리를 놓아 혼사를 거론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곱게 키운 귀한 딸을.. 있는 거라곤 힘밖에 없는 무지막지한 점백이에게 넘겨준다는 사실에.. 그녀의 부모는 억장이 무너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와 점백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허나 그녀와 점백이는 원래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짝이었는지.. 하늘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가 영은이를 낳은 지 첫돌이 채 못되어..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그만 고기밥이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바람이 몹시도 세차게 불고 집채만 한 파도가 치던 그날 밤.. 그녀는 밤새도록 울어대는 영은이를 꼭 안고 있었다.


원래 애정이란 게 없었던 관계였으므로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대로 아무런 미련 없이 그 섬을 떠났다.

어린 영은이는 친정부모에게 맡겨두고.. 가끔씩 찾는 걸로 대신하였다.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다고.. 그로부터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녀의 마음의 상처에는 영은이라는 딱정이가 곱게 앉아.. 그녀의 아픈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뭐하세요? 저길 잘 봐요! 사람들이 내리잖아요!"

그녀가 한성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예? 아.. 예!"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막 내리고 있었다.


"헉~!!"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내리고 나서 우려했던 그 뺨의 칼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싱글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뒤에는 예의 그 덩치 우람한 깍두기 둘이 알록달록한 남방을 걸치고 따르고 있었다.


"저.. 저기! 그 사람들이 내리네요!"

"예! 저도 보고 있어요. 빨리 여기를 피해야겠어요."

"그.. 그럽시다."

한성수는 앞장을 서서 냅다 뛰어 반대편 건물 모퉁이로 돌아갔다.

그녀가 영은이의 팔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영은이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팔에 이끌려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한성수는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다.

이 눔의 나라가 언제부터 이 모양이 되었는지.. 경찰서에서 빠져나온 탈주범이 온 데를 휘젓고 버젓이 배를 타고 나돌아 다니는데 도대체 경찰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렇게 선량한 백성들이 탈주범에 쫓겨 피해 다니는 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잠깐만! 내 곰돌이가 떨어졌어!!"

차미혜의 손에 잡힌 팔에 힘이 빠진 영은이는 그만 들고 있던 곰 인형을 놓치고 말았다.

영은이의 손에서 떨어진 곰 인형은.. 마치 곰이 재주를 부리듯.. 바닥에 한번 튀기고 나서 옆으로 또르르 굴러 옆 건물과의 틈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앗!"

그녀가 놀라서 곰 인형이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고 영은이도 그 뒤를 따랐다.

곰 인형은 틈 사이로 떨어지다.. 다행히도 간격이 좁아진 틈 사이에 꼭 끼어서는.. 두 팔을 벌리고 차미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약 오르지롱~ 메롱!!

곰 인형의 뒤편으로는.. 바다 쪽으로 향하는 수로(水路) 물이 흐르고 있어.. 자칫하면 떨어져 물길을 따라 망망대해로 사라져 버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바다로 떠내려간 곰돌이'가 되지 않게 하려고..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곰 인형을 집어 올리려고 팔을 틈 사이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손과는 거리가 먼 곳에 걸려있어서 털끝 하나도 닿지를 않았다.


"한성수 씨! 이것 좀 꺼내 주세요!"

혼자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아무도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한성수를.. 그녀가 애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SOS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팔은 손오공의 여의봉과는 달라서 필요에 따라 늘릴 수는 없는 법! 한성수가 아무리 팔을 늘여 허우적대 봐도 그의 능력으로는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서 긴 막대기를 구해 와야 할 것 같았다.


"급한데 그냥 가시죠! 나중에 더 예쁜 걸로 사주면 되잖아요? 그렇지 영은아?"

"아니야! 내 곰돌이 꺼내 줘~!"

"..."

"미혜 씨! 그들이 곧 올지 몰라요. 빨리 갑시다."

영은이의 동의를 구하는데 실패한 한성수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돼요! 꼭 꺼내야 돼요!"

오히려 영은이보다 그녀의 대답이 더 단호하였다.

"..."

그녀의 말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한성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되게 쫀쫀하군! 그깟 곰 인형이 몇 푼이나 한다고..."


"그럼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막대기를 구해올 테니..."

하는 수없이 한성수는 곰 인형을 구출할 긴 막대기를 찾으러 길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열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서울 구경하는 촌놈 마냥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깍두기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빨리 이곳을 벗어납시다! 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어서요!"

한성수의 다급한 말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방을 들고 모녀를 재촉하며 앞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는 아쉬운 듯 틈 속의 곰 인형을 한번 더 들여다보더니 마지못해 영은이 팔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급한 판국에 그까짓 곰 인형이 뭔 대수람?!"

한성수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뺨에 칼자국과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도.. 그가 왜 그렇게 그녀의 뒤를 쫓는지도 모르고.. 덩달아 허둥대고 있는 자신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게.. 바로 드라이버의 삶이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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