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셋

Driver(19회)

by 이은호



그 해 그 여름의 태양은 몹시도 뜨거웠고 거기에 못지않게 한성수의 가슴도 뜨거웠다.

하지만 한성수와는 달리 차미혜의 가슴은 쉽사리 뜨거워지질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좁혀질 듯 좁혀질 듯하면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원인은 차미혜에게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에게 있었다.

애타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만 애태우고 있었다.


지리산에서의 두 번째 밤!

깊은 밤 그리고 깊은 어둠 속에서.. 한성수는 뜨거워진 가슴을 혼자 조용히 삭이고 있었다.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성수의 두 눈에 반짝이던 별들이 점점 흐릿해졌다.


"한성수 씨! 옆에 앉아도 될까요?"

어느 틈엔가 그녀가 옆에 와있었다.

한성수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쓱 닦았다. 그제야 하늘에 떠있는 별이 다시 또렷하게 보였다.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가 그의 옆에 앉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성수는 정색을 했다.

"후훗~ 그럼 눈에 티라도 들어갔나 보군요."

"그..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미혜 씨는 왜 주무시지 않고 나오셨죠?"

"저.. 사실은 한성수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요?!"

"! 정말 많이 망설여지는 말이지만..."

"그래요? 무슨 말인데요? 미혜 씨 표정을 보니 제가 다 긴장이 되는군요."


"외람되지만 한성수 씨께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제게 부탁이요? 미혜 씨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말씀해 보세요."

한성수는 차미혜를 쳐다보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않으리라! 이미 그녀 때문에 충분히 놀랐던 터~!



"저.. 영은이 좀 맡아주실 수 있겠어요?"

"예? 영은이를.. 요?!"

한성수는 영은이를 맡아달라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절대로 놀라지 않으리라던 다짐이 불과 일분 전이었다.


영은이를 맡아 달라.. 그렇다면 영은이의 아빠가 되어 달라? 그렇다면 자기와 결혼을 하자? 아니 그럼 이거 프러포즈 아닌가!

그렇다면 이거 완전 ×망신이잖아! 사내대장부가 것도 베스트 드라이버가 여자한테 먼저 프러포즈를 받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수는 찢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풀렸다 하며 말이 없는 한성수를 보며 차미혜가 입을 열었다.

"역시 무리인가 보군요. 제가 좀 주제가 넘었지요?"

"아.. 아닙니다. 너무 뜻밖의 말씀이라서..."

"그럼 맡아주시겠어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싶은데..."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은이의 아빠가 되어달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다면 결혼하자는 말이 아니잖아!

이런~ 덴장! 그럼 뭐야?!



자신의 말 한마디에 표정이 왔다 갔다 하는 한성수를 보며 차미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사정을 말씀드려야겠지요?"

"...."

"한성수 씨를 믿고 모두 말씀드리겠어요.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아직도 제가 더 놀랄 일이 남았나요?"

"예?"

"아.. 아닙니다. 어서 말씀하시죠!"




IMF의 높은 파고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아픔을 주었다.

물론 한성수도 그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던 사람 중의 하나지만 차미혜의 오빠 차상호도 역시 그랬다.


차상호는 머리가 좋았다. 그리고 학창 시절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결과로 그 촌동네 출신으로는 드물게 당당히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왔고 당당히 일류회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여 윗사람의 신임도 받았다.

하지만 늘 그의 가슴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벤처 열풍이 불어 닥쳤다.

너도나도 벤처 설립에.. 각종 창업지원 그리고 묻지마 투자까지.. 3박자가 잘 갖춰진 호시절이었다.

차상호도 때를 놓칠세라 다니던 회사에 과감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평소 의기투합한 동료 몇몇과 벤처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아이템도 좋았지만 워낙에 벤처기업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았던 때라 손쉽게 필요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시작한 사업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나가는 듯했다.


쏠쏠한 재미를 보던 그들은 당연히 투자를 확대하였고 그 재원으로 은행 차입금은 물론 사채까지 빌려 쓰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이.. 회사를 조금 더 키워 코스닥에 상장시켜 대박을 터뜨리면.. 그깟 사채쯤이야 푼돈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IMF 사태를 맞을 줄 누가 알았으랴! 제대로 설비 가동도 못해본 상황에서 은행금리는 두배 세배로 뛰었다.

그들은 회사 부도를 막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주머니 돈 털어서 옆구리 막고 쌈짓돈 털어서 뒷구멍을 막았다.

그런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모든 게 역부족이었다.


차상호가 맥이 풀려 멍해 있을 때 그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바로 빰에 칼자국.. 그자였다.

고향 선배인 그는 차상호에게 자금을 대겠다고 했다. 얼마든지...

이게 웬일인가?! 차상호는 구세주를 만난 듯 뛸 듯이 기뻤고 그의 도움으로 발등의 불을 끌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빰에 칼자국의 자금이 점점 더 회사에 유입되었고 그 규모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을 때 빰에 칼자국의 표정이 바뀌었다.


사실.. 뺨에 칼자국 일당마약조직이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밀조한 마약을 국내에 들여와 풀었다. 그리고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그들은 그 돈 중 상당 부분을 해외의 제3 지대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IMF로 외환을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합법적인 창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차상호의 회사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의 마수에 걸려든 차상호는 어떻게든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자칫하면 회사를 송두리째 그 놈들 손에 넘겨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야 했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직원들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놈들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폐기 처분해야 할 불량부품을 물건 제조에 필요한 정품인양 속여 수입하고 그 대금을 송금하는 수법으로 외화를 유출시켰다.

온 국민이 장롱 속에 꼭꼭 숨겨뒀던 금붙이를 꺼내 들고 나와 한 푼이라도 외화를 모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그들은 마약 판돈을 합법으로 가장해 해외로 불법 유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차상호의 회사는 비슷비슷한 기업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갈 때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잘 버텨낼 수 있었다.

IMF가 서서히 끝나고 오히려 경쟁업체들이 사라져 버린 후 회사는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뺨에 칼자국의 조직이 회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이미 범법자가 되어버린 차상호는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차미혜는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 차례 마약 운반에 가담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올가미에 차미혜를 가둬 두려고 평범한 물건인 척 그녀를 속였던 것이다.


양심의 가책과 그것도 마약이라는.. 나라의 건강을 갉아먹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차미혜는 경찰에 신고하려고 몇 번을 마음먹었으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뺨에 칼자국 일당은 영은이를 볼모로 위협하였다.

차미혜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주변을 너무나도 잘 아는 뺨의 칼자국 일당으로부터 영은이를 보호할 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였던 세월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쁜자들에게 끌려 다닐 수는 없는 일! 이제 그녀는 확실한 결심을 하는 터였다.

우연히 만난.. 평소에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 그래서 빰에 칼자국 일당이 찾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고 영은이를 맡길 만한 마음이 따뜻한 사람.. 바로 한성수를 만난 것이다.




차미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한성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성수에게 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차미혜와 마약!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단어였다. 게다가 그녀가 운반책 노릇까지 했다니...


"이게 무엇인 줄 아세요?"

차미혜가 곰 인형을 흔들어 보였다.

"그거 곰돌이잖아요!"

한성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였다.

"이게 그냥 곰 인형이 아니거든요. 얘 뱃속에 그게 들어있어요. 하얀 가루요."

"예? 정말요??"

"증거물인 셈이죠."

그녀가 곰 인형을 딸랑딸랑 흔들었다.


한성수는 그제야 곰 인형이 건물 틈새에 빠졌을 때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가 그렇게 되찾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영은이를 맡기로 하지요. 엄마가 보살펴주는 것만큼못하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성수는 그녀가 자신을 믿고 그렇게 큰 결심을 하는데 꽁지를 뺄 수가 없었다.

것도 자신의 작은 희생으로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건강에 크게 이바지하는 일인데 말이다. 한성수는 갑자기 자기가 무슨 정의의 투사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꼭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혜는요..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한성수도 미소를 지었다.



까만 하늘 저편에 유성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유성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한성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맘속으로 소망하였다. 그녀에게 별일이 없기를...


한성수는 한참 후에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방 한쪽 편에 영은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살며시 다가가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영은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영은이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참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얼굴이었다.


"이제 또다시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겠지만 이 아저씨가 잘 보살펴주마! 어쩌면 우리가 만난 게 서로에게 행운이 될지도 모르지..."


한성수는 영은이의 작고 하얀 손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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