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만들기

Driver(20회)

by 이은호



차미혜에게 영은이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자기가 원해서 낳은 새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 뱃속에서 열 달을 우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던가!

사실 차미혜는 점백이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나쁜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자기는 그렇더라도 뱃속의 아기야 아무 잘못 없는 소중한 생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었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어린 영은을 보자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견디기가 힘들었고 이웃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참기가 힘들었다.

젊은 나이에 기구한 운명이 된 딸을 보는 부모의 심정도 찢어지는 것 같아서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차미혜는 부모님의 권유도 있고 자신도 섬에서 더 버틸 자신이 없어 어린 영은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고 말았다.


한동안의 방황 끝에 마음을 바로잡은 영은은 대학교에 복학하여 졸업을 하였고.. 오빠를 도와 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회복해가고 있었다.


차미혜는 영은과도 한참을 떨어져 지냈으나 어쩔 수 없는 핏줄에 대한 끌림과 연민이 발걸음을 섬마을로 이끌었고.. 영은을 보는 횟수가 거듭되자 그 애착은 더 커지게 되었다.

영은은 처음엔 그녀를 서먹하게 대했는데..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했는지.. 이내 잘 따르게 되었고 엄마 앞이라고 귀여운 재롱도 곧잘 부리곤 하였다. 한 번씩은 부모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면서 나이에 비해 일찍 철들어 버린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차미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영은을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영은은 아빠를 닮아서인지 튼튼하게 잘 자라주었고 엄마를 닮아서인지 예쁘고 영특하기까지 하였다.

차미혜는 그런 영은을 머지않아 자기가 데려가서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미혜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통나무집 앞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겨있는 차미혜를 한성수가 부르며 다가왔다.

"아 예.. 한성수 씨, 잘 주무셨어요?"

"네 저야 잘 잤죠~ 제가 아침식사로 간단하게 라면을 끓였는데 가시죠!"

"어머.. 그래요? 제가 생각 좀 하느라고 미처 알아채지 못했네요."


어젯밤 차미혜와 영은은 방에서 잤고 한성수는 주방 겸 식당 겸 거실에서 혼자 웅크리고 잤다.

한성수가 눈을 떠 보니 영은은 피곤했던지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고 차미혜는 보이지 않았다.

창밖을 통해서 내다보니 그녀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해서 방해하기가 어려웠고.. 배도 고프고 할 일도 없었던 한성수는 자기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라면을 끓였고 그녀를 부르러 갔던 것이다.


"라면이 뭐 이래?! 팅팅 불어서 죽 같애!"

그새 시간이 지나 면발이 팅팅 불은 라면을 한입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영은이 불평하였다.

"어? 그럼 영은이 거는 새로 끓여줄까?"

영은의 불평에 한성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영은을 바라보았다.

"그래? 엄마는 맛있는걸? 아저씨가 정성 들여 끓인 거니까 우리 맛있게 먹자~!"

차미혜가 영은을 달래며 김치를 작게 잘라 영은의 라면 그릇에 올려 주었다.

"우리 영은이 김치도 잘 먹지? 김치랑 함께 먹으면 라면이 훨씬 맛있어요~"

"알았어 엄마, 이번만 참고 먹을게."

"그 그래 고맙다! 영은아~ 담엔 정말 맛있게 끓여 줄게!"

한성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미혜의 생각에 영은이를 한성수에게 맡기려면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는 게 최대의 관건이었다.

사실 섬을 빠져나온 이후 같이 여행을 하는 것도 다 그 이유에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의 관계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이 대화로 티격태격하는 걸 보면 오히려 죽이 꽤나 잘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함께 놀이공원 갈래요? 차로 두 시간 정도 가면 될 것 같은데..."

차미혜가 한성수를 보고 말했다. 아이와 친해지는데 놀이공원만한 데가 있을까 싶어 생각해낸 장소였다.

"어 그래요? 그거 좋죠!"

"와~ 신난다!!"

"근처에 온천도 있어서 피로도 풀 수 있을 거예요!"

차미혜가 한 푼 더 보탠 말에 한성수는 한층 구미가 당겼다.



그들이 찾은 놀이공원은 그다지 큰 곳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어린 영은이와 함께 즐길만한 놀이기구가 많이 있었다.

영은이는 한 손에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풍선을 들고 한 손에는 분홍색 솜사탕을 들고 씩씩하게 앞서 걸었고.. 그 뒤를 따르는 한성수와 차미혜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은아~ 우리 범퍼카 탈래? 아저씨가 완전 베스트 드라이버잖니!"

한성수가 영은이를 보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좋아요~!"

놀이공원 분위가 좋아서인지 쩔쩔매는 한성수가 불쌍하게 보였던지 영은이 쉽게 승낙을 하였다.

영은이는 바로 한성수와 같은 범퍼카를 탔고 오히려 차미혜가 혼자 다른 범퍼카를 탔다.


과연 한성수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그는 영은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며 범퍼카를 몰았다.

마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복잡한 범퍼카 사이를 잘도 빠져 다녔고 차미혜가 탄 범퍼카를 사정없이 들이받아 놀려 주기도 하였다.

영은이도 까르르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범퍼카 다음엔 크게 원형으로 돌면서 자체 회전도 하는 커피잔을 타고 이어서 회전목마도 탔다.

한성수는 영은을 앞에 앉히고 유려한 몸짓으로 백마를 타고 날아가는 차미혜의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엄마와 함께 즐겁게 목마를 타며 활짝 웃는 영은의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회전목마에서 나온 차미혜는 영은이를 데리고 꼬마 비행기 타는 곳으로 갔다. 꼬마 비행기는 크게 원을 돌며 회전하고 각자 수동으로 높게 또는 낮게 높이를 조절하는 놀이기구였다. 역시 한성수와 영은이가 같이 탔고 차미혜가 혼자 탔다.

어린이용 놀이기구였지만 높이를 높게 조종함으로써 어른도 제법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재미나는 기구였다. 한성수는 계속 고도를 낮췄고 그러면 영은이는 이에 질세라 계속 고도를 높여 나갔다.

그 뒤를 쫓는 비행기에 오른 차미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것저것 놀이기구를 타면서 영은이도 영은이었지만 오히려 한성수와 차미혜가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영은이를 핑계로 둘의 데이트가 목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 배고파~!"

영은이가 햄버거 가게를 가리키며 엄마 손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죽이 맞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래그래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가자!"

일행은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노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앉아 맛있는 걸 먹는 것도 놀이공원에서 느끼는 재미 아니겠는가!


"아저씨,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한단 말예요!"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듯 게걸스럽게 햄버거를 먹어대는 한성수를 보고 영은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래~ 알따!"

한성수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하였다.

쯧쯧~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앤지...


적당히 배를 채운 일행은 마지막으로 대관람차에 올랐다. 놀이동산에 왔으면 꼭 타야 하는 게 대관람차였다.

이번에는 한쪽 편에 차미혜와 한성수가 나란히 앉고 반대편에 영은이가 혼자 앉았다.

천천히 회전을 하면서 조금씩 고도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 주위의 풍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어느덧 저 멀리 푸른 논밭이 내려다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산과 계곡이 비슷한 높이로 보이는 듯했다.

"저 밑에 사람들이 꼭 개미같애~!"

영은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한성수와 차미혜는 즐거워하는 영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놀이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들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온천에 들러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차에서 내린 영은은 어느덧 한성수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고 차미혜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가족탕으로 드릴까요?"

카운터에서 접수를 받는 아가씨가 물었다.

"....."

한성수는 순간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했다.

가족탕이라.. 이런 고마울 데가? 남들이 봐도 우리가 평범한 가족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아뇨~ 그냥 남녀 각각 표를 끊어 주세요."

뒤에서 차미혜의 초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그동안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한성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엉겁결에 차미혜를 따라나선 여행이라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된 긴장의 연속 상황에서 심신이 정말 피곤했었다.


차미혜의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되었고 영은이를 만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그 아이의 임시 보호자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차미혜는 범죄 스토리에 연루되어 있고 어찌 보면 자신은 지금 범죄자와 도피 중인 셈이었다.

이게 도대체 있을 법한 일인가? 드라마틱한 사연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말이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차미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그녀를 원하고 있는 것이며.. 그녀는 또한 나를 받아줄 것인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진심이었다. 그리고 영은이가 좀 당돌하기는 하지만 귀엽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운명이 이끄는 대로..."

한성수는 머리를 흔들며 탕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머리까지 푹 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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