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몸으로 낳지는 않았지만 한성수를 지극정성을 다해 키운 노부부는 돌아가신 후 충남 부여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학창 시절 어지간히도 노부부의 속을 썩였던 한성수는 철이 들고부터 자기 때문에 노부부가 일찍 돌아가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또 뵐 면목이 없다는 핑계로 노부모 산소를 잘 찾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찾아뵙기가 힘들어졌고 그 세월이 벌써 십 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성수는 어제 차미혜와 영은이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마치 평범한 가족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불현듯 노부부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만일 차미혜 모녀를 데리고 찾아뵙는다면 아내와 딸과 함께 온 줄 알고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면 살아생전 무던히도 속을 썩였던 그 잘못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차미혜 모녀를 노부모께 보여드리고 허락을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제가 부모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해 드렸는데 저 혼자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도 될까요?" 하고 묻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노부모의 산소를 차미혜와 영은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허락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제가 차미혜 당신과 함께 해도 될까요? 영은이의 아빠가 돼도 될까요?"
한성수는 아침식사 준비로 바빴다.
어제 팅팅 불은 라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오늘은 참치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리고 매운 김치찌개가 먹기 힘들 영은을 위해 계란 프라이를 했다.
물 조절 실패로 밥이 살짝 질긴 했지만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고 참치 김치찌개와 계란 프라이는 어지간해서는 망칠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김치찌개, 계란 프라이, 즉석 김, 오이, 고추에 된장.. 뭐 그 정도면 한성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인 셈이었다.
다행히도 모두들 잘 먹어 주었고 영은이는 의외로 참치 김치찌개도 좋아했다.
"참치 김치찌개 맛있어~ 아저씨 오늘 요리 짱이예요!"
"그래? 정말 고맙다. 영은아~"
영은의 한 마디에 한성수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식사 후 설거지까지 끝낸 한성수는 정성을 다해 타 가지고 온 믹스커피를 차미혜에게 건네고 자신도 한 모금 마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혜 씨,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한번 들어봐 주시래요?"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저.. 서울 가는 길에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 산소에 들렸으면 하는데 혹시 함께 가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부모님 산소를 찾은 지가 너무 오래돼서 영 마음에 걸리네요."
"그러시군요. 거기가 어디죠?"
"부여 근처입니다."
"그런데 혹시 저와 함께 가시려고 하는 무슨 의미라도 있나요?"
"그 그런 건 아니구요. 헤헷~"
"알았어요. 함께 가죠 뭐~"
"옛?! 정말입니까?정말 그렇게 해주시는 거죠?"
"그래요~ 가자니까요! 호호~"
차미혜가 웃으며 흔쾌히 허락하였고 한성수는 기쁨에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성수는 노부모 산소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약간의 제수(祭需)를 준비하였다. 탁주 한 병, 마른 북어 한 마리, 사과와 배 몇 개, 사탕 한 봉지 그리고 노부모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카스텔라 빵을 샀다.
거진 십 년 만에 찾는 길인지라 한성수는 선산 초입에서 잠시 헷갈렸지만 이내 기억을 살려 제 길을 찾아냈고 크게 헤매지 않고 노부모 산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찾는 사람이 없기도 했거니와 잡초가 여름 내내 수북이 자라 산소 주변은 모양이 말이 아니었다.
한성수는 아까 슈퍼에서 구입한 낫을 꺼내 들고 잡초를 베었고 차미혜 모녀는 그늘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풀을 베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그를 도와주려고 해도 딱히 할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어느 정도 주변 정리를 끝낸 한성수는 노부모 무덤 앞에 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제수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종이컵에 탁주를 따라 노부모 묘에 올리고 절을 하였다. 한성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 어머니, 한성수가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진작에 왔어야 했는데 못난 놈이 찾아 뵐 용기가 나지 않아 그러질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오늘 아버지 어머니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예쁘고 귀여운 아이입니다. 제게 과분한 사람들입니다. 좋게 봐주시고 저랑 좋은 인연이 되게 해 주십시오."
차미혜는 부모님 묘에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한성수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영은을 데리고 한성수의 뒤편으로 가서 섰다.
잠시 후 한성수가 절을 마치고 일어서자 차미혜가 영은에게 말했다.
"영은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자~!"
"누구야~ 엄마?"
"아저씨 엄마 아빠인데 웃어른이니까 인사드려야겠지?"
"알았어~ 엄마!"
차미혜는 영은과 함께 한성수 노부모께 절을 올렸다.
한성수는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랐으나 속으로는 무척 기뻤고 또 차미혜가 너무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미혜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뭐 힘든 일도 아닌데요. 한성수 씨 부모님이면 그래도 웃어른인데 인사를 드려야죠. 그리고 사실 이러려고 저희와 같이 오신 것 아니에요?"
차미혜의 말에 한성수는 가슴이 뜨끔 하였다.
차미혜는 사실 한성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분간 영은을 맡기기로 하였거니와 또 앞으로 자기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그를 오래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사람이 믿을만했고 진실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신뢰가 가기는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뭔가가 가로막혀 있었고 그걸 걷어내기 위해서는 뭔가를 더 필요로 했다.
다만 그 뭔가를 차미혜는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성수 부모 산소에도 자진해서 따라나섰던 것이었다.
그들이 용왕동에 있는 용왕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막 넘어서였다.
용왕동은 차미혜가 사는 상곡동과는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차미혜는 얼마 전 이곳에 전셋집을 마련해 놓았었다. 일이 터지면 빰에 칼자국 일당의 눈을 피해 영은과 함께 살 은신처인 셈이었다.
한성수는 깊은 잠에 빠진 영은이를 방 침대에 눕히고 거실로 나왔다.
차미혜는 주방에서 과일과 마른안주를 장만하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몇 캔을 꺼내 함께 쟁반에 담아서 들고 왔다.
"먼길 운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시원한 맥주 한잔 하세요!"
"안 그래도 갈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네요~ 같이 한잔 하시죠!"
둘은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쨍~ 가볍게 부딪히고 나서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한성수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맥주 한잔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차미혜는 예금통장 한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한성수 쪽으로 밀었다.
"여기 통장에 생활비가 들어있어요. 영은이를 돌보시려면 아무래도 일을 제대로 못하실 텐데 돈 걱정은 마시고 영은이를 잘 돌봐 주세요."
"아.. 안 그래도 되는데요, 이것 참~!"
한성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굳이 사양하지는 않았다.
영은이를 봐주기로 했을 때 이미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가진 게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영은이를 풍족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였었다.
"한성수 씨, 영은이는 참 불쌍한 아이예요.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아빠도 엄마도 없이 외롭게 자랐죠. 이젠 영은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해요. 아무쪼록 우리 영은이를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세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영은이를 잘 보살필게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미혜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한성수 혼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맥주는 이미 다 마셨고 냉장고에서 다시 꺼내온 맥주 몇 캔을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욕실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오롯이 내가 영은이를 돌보게 되었군! 애 하고 놀아본 경험도 없는데 영은이랑 잘 지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는 맥주잔을 다시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
욕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차미혜가 얇은 옷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과 맥주를 몇 잔 마셔서인지 발갛게 달아 오른 두 볼 그리고 몸매가 살짝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은 차미혜의 모습은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매끈한 종아리와 작은 발이 하얗게 빛났다.
그런 모습을 슬쩍 훔쳐보는 한성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저 밑에서 뭔가 불기둥 같은 게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