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으며

by 이은호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춥지도 않고 바람이 세지도 않고 비가 많이 오지도 않는 날이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문득 빗속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집을 나섰다. 큰 우산 말고 접는 우산을 집었다. 그날은 왠지 작은 우산을 받쳐 들고 조금은 몸으로 빗방울을 맞으며 걷고 싶었다.


집 앞 하천변 산책로 길을 따라 걸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도 뜸하고 주변 풍경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산에 투둑투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터벅터벅 지면에서 올라오는 내 발자국 소리가 함께 이어졌다. 한적한 길을 혼자 우산을 쓰고 걷자니 조금은 센티한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부자 동네로 향했다. 마치 부자 동네 주민인양 그쪽 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울긋불긋 예쁜 꽃들로 화단을 잘 꾸며 놓았다. 하천변 정리도 잘되어있고 온통 꽃밭이었다. 처음엔 꽃길 따라 걷는 게 좋았는데 걸을수록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다음 다리에서 다시 하천을 건너 우리 동네로 왔다.


가난한 우리 동네에는 알록달록 꽃밭이 없었다. 유채밭이랑 청보리밭이 다였다. 빈 땅으로 놔두자니 건너편 동네 눈치도 보이고 해서 심었나 보았다. 그것도 익으면 유채기름과 보리수확이 가능하니 구황작물이다 생각해서 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부자 동네 꽃밭이건 가난한 동네 청보리밭이건 비는 똑같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하천에서 오리들의 자맥질이 한창이었다. 하기야 쟤네들은 비가 오건 말건 물속을 헤집고 먹이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한놈이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니들은 재료 씻을 일도 없고 요리 할 필요도 없어서 좋겠다 싶었다. 가진 것 없어도 변변한 집 한 채 없어도 오늘하루 배부르면 족하겠다 싶었다.

노란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지나갔다. 모자와 바지가 비에 흠뻑 젖었는데 까만 선글라스는 그대로 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걸 보니 남자는 역시 뽀다구가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그나저나 건강하려고 타는 자전거인데 오히려 저렇게 비를 맞으면 감기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저만치 앞에 한 처자가 빨간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곤색 트레이닝복을 입었는데 아래는 트레이닝복인지 레깅스인지 모를 정도로 몸에 딱 달라붙어 윤곽이 다 드러나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윤곽은 더 또렸해져 왼발오른발 옮길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는 엉덩이가 시선을 어지럽혔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려고 고개를 돌렸다가도 이내 신경이 쓰여 눈길이 자꾸 그곳으로 갔다. 안 되겠다 싶어 걸음을 재촉해서 앞질러 가기로 했다. 지나치면서 슬쩍 보니까 그렇게 젊은 처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쩐지 사이즈가 크더라 싶었다.


전철역 근처에 다다르자 역사 밑에서 남학생 한 명이 농구공을 튕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구 비가 안 왔으면 친구들과 재밌게 농구시합을 할 텐데 혼자 재미없게 공만 튕기고 있네 싶었다. 그 학생은 한 번씩 비를 맞으며 조금 떨어진 농구골대까지 공을 드리블해 가서 슛을 쏘았다. 에구 너도 어지간히 심심하구나 싶었다. 혹시 몰랐다. 집에서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다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 홧김에 나왔는지도...


전철역으로 올라가 보았다. 뭐 전철 타고 어디로 갈 생각은 없었고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휴일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날씨만큼이나 굳은 표정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원래 속은 따뜻하겠지 싶었다. 그렇게 역사를 서성이다가 들어온 김에 뭔가 흔적은 남겨야겠다 싶어 화장실에 들렀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전철역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터벅터벅 걸어서 시장통으로 향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이 좋겠다 었다. 칼국수 한 그릇과 깍두기 한 종지. 그것으로 족했다. 뜨끈한 국물이 뱃속을 채우고 이마엔 땀이 송송 맺히고...



시장통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다시 하천변을 걸을까 생각했지만 배가 부르니 만사가 귀찮게 여겨져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집까지 세 정류장. 순식간에 닿았다.



아~ 완전 실패였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수에라도 잠겨보고 싶었는데, 중년의 고독을 씹어보고 싶었는데,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지 고민해보고 싶었는데.. 눈에 걸리는 게 왜 그다지도 많더란 말인가!


결국은 먼 길 돌아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온 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조각 난 감성을 다시 맞춰보았다. 음악을 들으며...



https://youtu.be/XEdnRdBiaH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눈에 띄면 다 홈베이킹 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