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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May 08. 2023

친구 따라 절에 간 사연(중)



L이 강제로 입산수도(?)에 들어간 후 나를 비롯하여 속세에 남겨진 친구들은 L이 잘 지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였다. 누구보다도 활발한 성격에 남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L이 절간 같은 곳에서 스님한테 붙잡혀 염불이나 듣고, 아니면 스님의 감시하에 독방에 갇혀 책이나 읽고 있을 생각을 하니 여간 불쌍하게 생각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 몇이 L을 찾아가 위로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은 L이 없는 속세가 너무나 재미가 없기도 하였다. 새로 들어선 신군부의 사회개혁 정책의 일환인가 뭐시기로 재학생의 입시학원 출입이 금지되어 더 이상 학원에도 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나라에서 학생들 공부도 못하게 방해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가 빠진 미팅전선에도 이상이 생겼다. L이 떠나버린 후 나머지 2진급으로는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성공 확률이 2할대에 머물러 선수들 사기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L이 지내는 상황도 궁금했지만 우리들의 상황도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어서 L을 만나 하소연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혹시 L이 숨겨둔 비법을 전수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L이 유폐되어 있는 절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연결이 될지 걱정했지만 예상외로 어렵지 않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월 모일에 우리가 위문방문을 가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한참 풀이 죽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던 L이 뛸 듯이 기뻐하였다. 너무 보고 싶다고 니들밖에 없다고 빨리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에구 가엾은 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월 모일 연휴에 나를 포함하여 친한 친구 네 명이 위문대를 성하여 방문길에 올랐다.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달려 L이 잡혀있는 절이 위치한 마을에 다달았다. L은 버스정류장에서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거의 달 만에 만난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년 만에 만나는 가족보다도 더 반가운 재회였다.


L은 마치 행자처럼 승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잘 어울려 역시 옷걸이가 좋은 놈은 뭘 입어도 태가 나네 싶었다. 왜 승복을 입고 있는지 물으니 혹시 도망갈지 모른다고 아버지 명령으로 사복은 다 뺏기고 승복을 지급받았다고 하였다. 에구 불쌍한 놈!


L이 우리를 근처에 있는 가게로 이끌었다. 얘가 절에서 초식으로 연명하느라 얼마나 군것질을 하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L은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막걸리 두병에 맥주 몇 병 그리고 오징어와 새우깡 등 안주거리를 챙기는 것이었다.


"야! 이거 뭐 하려고?"

"가지고 올라가야지."

"뭐? 절에서 술을 먹는다고?"

"괜찮다! 일과시간 이후에는 스님이 내 방에는 절대로 안 들어온다. 방 안에서 마시면 절대 안심이다."


우리는 L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각자 가지고 간 가방에 두둑하게 술과 먹을거리를 챙겨 넣산에 올랐다.




"주지스님, 친구들이 왔습니다."

"안.. 안녕하십니까?"

"어서들 오시게!"


우리는 꾸벅 고개를 숙여 주지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스님은 합장을 하시며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사를 받으셨다. 사실 우리는 절에 별로 가보지도 않았고 스님께 인사를 드린 적인 없어 합장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먼저 L의 방에 짐을 푼 다음 친구를 따라 대웅전으로 갔다. 절에 왔으면 최소한 부처님께 인사는 드려야 했다. 대웅전 안에는 스님이 예불을 고 계셨다. L은 능숙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렸고 우리는 L을 힐끗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했다.


L을 따라 절 뒤편에 있는 산엘 올랐다. 간밤에 비바람이 심했는데 유선에 이상이 생겼는지 티브이가 안 나온다고 했다. L은 유선줄을 훑으며 산을 능숙하게 올랐고 우리는 헥헥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근데 그건 그렇고 공부하러 절에 온 애가 왜 유선줄을 훑으며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산등성이를 올라가자 작은 구조물이 나왔고 그 위로 티브이 안테나가 솟아 있었다. L은 이곳이 산이 깊어 이렇게 산등성이에 안테나를 설치해야 전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L은 안테나 연결부위에서 빠진 선을 능숙한 솜씨로 연결하고 살짝 돌아간 안테나를 다시 단단하게 붙들어 매었다.


L의 말에 따르면 주지스님을 도와 자기가 절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한다고 했다. 원래 다른 스님이 한 분 더 계셨는데 일 년 동안 큰 절로 공부하러 가셔서 자기가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주지스님과 사이가 아주 돈독해져서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하기야 훤칠한 키에 활달하고 붙임성 있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나서서 일을 도와주는 L을 주지스님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듯싶었다. 딱 보니까 공부는 뒷전이고 아예 행자승 노릇을 하는 듯싶었다.


주지스님도 처음에는 L의 부친의 당부도 있고 해서 단단히 감시를 하며 L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L과 친해지면서 L매력에 푹 빠져 L의 부친의 당부는 까맣게 잊고 L과 알콩달콩 절 살림살이에 재미를 붙이신 모양이었다. 역시 친화력 갑의 L이었던 것이다.




절을 찾는 여성 신도분들이 많았다.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자주 찾는 아주머니들도 꽤 있었는데 개중에는 자식들 대학입시 합격을 비는 분들도 계셨다. 근데 절에 훤칠하게 잘빠진 젊은 행자가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띄었고 도대체 뭐 하는 앤가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주지스님께 물어보니 이미 L의 매력에 푹 빠진 스님께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으셨다.


부산에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 서울에 좋은 대학에 가려고 절에 들어와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애가 머리랑 인물만 좋은 게 아니고 심성도 착하고 어른들에게 잘하고 또 아주 부지런하다고. 내가 딸이 있으면 사위를 삼을 텐데 그러진 못하고 이참에 잘 구슬려서 상좌를 삼을까 한다고.


절을 찾는 아주머니들의 눈이 돌아갔다. 저렇게 훌륭한 학생이 있나? 사위를 삼을까 아니면 양아들을 삼을까? 아주머니들이 L이 절에서 혼자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도 챙겨 와서 몇 개씩 먹였다. 그러고 보니까 L이 속세에 있을 때 보다도 훨씬 얼굴이 좋아 보였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L은 이미 많은 아주머니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그분들 따님의 신상정보까지 꿰차고 있었다.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고 몇 학년이고 이름이 어떻게 되고, 합격 기도 때 쓰는 사진까지 확보해서 예쁜지 못난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마치 무협지를 보면 자질이 출중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기연(奇緣)을 만나서 초절정고수로 거듭나게 되는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L이 꼭 그런 꼴이었다.


L이 떠난 속세에서 우리는 손톱이나 물어 뜯으면서 정말 재미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인적이 뜸한 절로 유폐된 L은 오히려 거기서 훨훨 날고 있었던 것이었다.



<계속>



* 분량조절에 실패해서 상, 중, 하로 갑니다. 다음 편엔 기필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입시기도도량 팔공산 갓바위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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