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공양을 마치고 숨을 돌리고 있는데 주지스님께서 L에게 말씀하셨다. 산 밑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를 냉장고에 넣어 놓았는데 그걸 스님께서 보신 모양이었다. 냉장고가 비좁아 막걸리만 거기에 두고 맥주는 뒤편 물통에 넣어 놓았는데 아마도 그것까지는 못 보신 듯했다. 스님은 작은 찻잔에 곡차를 한잔씩 따라서 우리들에게 건네주셨다. 그리고 한잔을 드시고는 일어서서 나가시면서 말씀하셨다.
"곡차 맛이 아주 좋구나! L아, 밤에 네 방에서는 무엇을 해도 좋은데 절대로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는 안된다."
"네~ 알겠습니다. 스님."
우리는이구동성으로 합창을 하였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술을 먹지 마라' '고기를 먹지 마라' 하는 금지 식품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그 당시 백성들로부터 대중공양(大衆供養)을 받는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음식을 가리는 것 자체가 사치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였다. 다만 세월이 흘러 불교가 체계를 잡으면서 수행(修行)을 해야 하는 스님들이 수행에 방해가 되는 양기 음식을 경계하면서 생긴 법도라고 한다. 그래서 양의 기운을 돋우는 술과 고기 그리고 마늘, 파, 부추, 달래, 아위의 오신채(五辛菜)를 먹지 않은 풍습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또한 나라와 종파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재가신도(在家信徒)의 경우에도 경계하라는 의미의 5계(五戒) 또는 5악(五惡)이라는 것이 있다.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음주의 다섯 가지이다. 이중에서도 음주를 가장 경계하였다. 음주가 사람의 마음을 흩트려 놓고 아울러 다른 잘못들을 연쇄적으로 저지르게 한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사내가 살았다. 하루는 마루에 앉아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이웃집 암탉이 담을 넘어서 안마당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술도 한잔 했겠다 간이 부은 사내는 '저놈을 잡아서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탉을 잡아 푹 삶아 백숙을 만든 사내는 고기를 뜯으며 술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이웃집 아낙네가 사내를 찾아왔다. '혹시 닭 한 마리 못 봤수?' 하니 '못 봤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사내가 술기운이 오른 붉은 눈으로 이웃집 아낙을 보고 있자니 음심이 돌았다. '좋은 술과 안주가 있는데 올라와서 한점 하시구려!' 하고 권하니 마침 배가 출출하던 아낙이 사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둘은 술이 오르고 숨이 가빠진 아낙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아낙의 가슴을 훔쳐보던 사내가 슬그머니 아낙의 손을 잡았다. 아낙은 실쭉이 눈을 흘기고는몸을 꼬며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아낙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둘이 엎어지고 말았다.
음주로 시작된 사내는 반나절만에 5계를 모두 범하고 만 것이다.
L의 방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판을 벌였다. 남은 막걸리와 찬물에 담가놓은 맥주를 들고 왔고, L은 부엌에서 오징어를 노릇노릇하게 구워 왔다. 그리고 다른 안주거리를 모두 펼쳤다. 우리는 잔에 맥주를 부어서 건배를 하였다. 술이야 이미 담임선생님이랑 사부님과 민물고기를 잡으러 다닐 때 하야비치로 주도(酒道)를 깨우친 후였으니 맥주 정도는 가벼웠다.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맘껏 풀며 밤늦도록 달렸다.
아마도 주지스님도 눈치를 채셨을 것이었다. 그러나 절에 닭이 있을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린 우리가 회포를 풀 아낙이 그리운 것도 아닐 테니, 방에서 나오지만 말라고 다짐하는 정도로 충분했을 것이었다.L의 매력에 푹 빠진 스님께서 그 정도는 눈감아주실 넉넉한 품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술자리가 끝이 났다. 남은 건 술병을 치워 술 마신 증거를 없애는 일이었다. 사실 절에 술병이 굴러다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자칫 절을 찾는 신도나 등산객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잘못하면 스님이 맨날 술이나 마시는 땡중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가 아까 낮에 봐둔 지근거리에 있는 저수지에 버리기로 하였다. 논에 물을 대는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였는데 그곳에 빠뜨리면 쥐도 새도 모를 듯싶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저수지로 갔다. 거기서 맥주병을 물에 던져 넣고 모두들 옆으로 나란히 서서 한참을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갈겼다. 물줄기 다섯 가닥이 저수지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몇 시나 되었을까? 스님께서 방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외우시는 염불소리에 잠을 깨었다.게슴츠레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L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취침 시간은 자유인데 기상 시간은 지켜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할 수 없이 겨우 두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났다. 그래도 두 시간 동안은 거의 기절을 해서 인지 피로가 좀 풀린 듯하였다.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나서 근처를 둘러보고 있는데 친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야! 큰일 났다. 맥주병이 물 위에 동동 떠 있어!"
"뭐라고?!"
그랬다. 수영 못하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꼬로록 가라앉는다고 해서 '맥주병'이라고 하는데, 그건 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간밤에 저수지에 던져 넣은 맥주병들이 하나도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이걸 어떡하지?"
"범행현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잖아!"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스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손은 닿지 않고 물이 깊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돌을 던져 병을 맞추어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병을 맞추기도 힘들었고 맞아봤자 고개만 살짝 갸우뚱할 뿐 여전히 동동 떠서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L이 어디론가 급히 뛰어가더니 대나무 장대를 가지고 왔다. 간밤에 생각 없이 멀리 던져 넣은 맥주병들은 장대 하나로는 닿지 않았다. L이 다시 뛰어가서 다른 대나무 장대와 노끈을 들고 왔다. 장대 두 개를 연결하니 겨우 맥주병에 닿을 수 있었다. 둘이 붙어서 장대 끝을 잡고 다른 한 명이 잘 조준하여 맥주병 주둥이를 꼭 눌러서 한 놈씩 수장시켜 나갔다.
'꼬로로로로-ㄱ'
맥주병들이 모두 가라앉자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다섯 명이 나란히 서서 시원스레 오줌발을 저수지로 내질렀다.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돌아와 아침 공양을 맛있게 먹었다. 새벽부터 한바탕 진땀을 흘려서인지 밥맛이 꿀맛이었다.
L은 6개월을 절에서 보낸 후 학교로 돌아왔다. L의 아버지가 L을 절에 놔두어봤자 공부가 안된다는 상황을 알아채셨고,게다가자칫하면 주지스님의 꾐에 넘어가 L이 출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행여라도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차라리집에 잡아두면매일 한번씩 보면서 잔소리를 할 수 있으니24시간 무방비로 풀어놓는 절보다는 나을 듯싶었던 것이었다.
반면에 주지스님은 L이 환속을 할 때 굉장히 안타까워하셨다고 했다. 다른 종교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여신도들이 많은 절에서 허우대가 그럴듯한 스님이있으면 절의 살림살이에 꽤나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스님이 보기에 L을 잘 키우면 절을 한번 크게 일으켜세울 수 있는 재목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L은 그래도 6개월간의 입산수도에 뭔가 깨달은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학입시에 실패하면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선언에 정신을 차렸는지도 몰랐다. 책가방에 커다란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싸갖고 다니면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물론 처음의 각오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공부보다는 운동장에서 후배들과.. 3학년들은 공부한다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축구를 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자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책을 전혀 보지 않는 건 아니었다.그리고 사실 몇 번 나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가기도 했다.
한번은 L이 책상에 엎드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절에 있었으면 신도 아주머니들의 딸들을 죄다 만나보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고...
L의 손에 예쁘장하게 생긴 한 여학생의 사진이 들려있었는데 아마도 데이트라도 하는 꿈을 꾸지 않았나 싶었다.
<끝>
* 이야기 중에 절이나 스님에 대하여 다소 불경스러운 내용이 나오는데,40년도 더 된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까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또 재미를 위하여 과장되게 표현된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절은 경건한 기도 도량이며 절대로 폄하할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