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너머로 반가운 K의 목소리가 들렸다. K는 회사에 같이 근무를 했던 직장동료인데, 사실 나보다 입사가 1년 빠른 입사선배였다. 하지만 나이가 같았고 회사의 ERP System 도입 프로젝트 때 모듈러로 참여하면서 함께 일한 인연을 갖고 있다. 당시 둘이는 의기투합하여 회사의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많이 뜯어고치며 의욕에 불타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다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하던 K가 회사를 먼저 떠나게 되었고, K는 조그만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끔 만나서 스크린골프도 치고 술도 한잔 하면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이다.
나는 K를 만나기 위해 울산행 경전철을 탔다. 중간에 K가 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송정역에서 내렸다. 오늘 우리가 걸을 산책로는 송정~해운대로 이어지는 '문탠로드'이다.
문탠로드는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넘어가는 달맞이 고개에 있는 갈맷길로, '달빛을 받으며 걷는 숲속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밤에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호젓한 길을 걸어야 제대로 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건 알콩달콩사연이 있는 연인들 사이의 이야기이고, 나이 든 남자 둘이 분위기 잡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햇볕이 따땃한 낮에 운동삼아 걷는 거지.
옛날에 동해남부선 기차가 다닐 때는 그 기차를 타고 바닷가를 따라서 송정이나 기장, 일광 등으로 놀러 다녔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학생들은 그 기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학교로 통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동해남부선 기차는 끊어지고, 그 철길에는 해운대~송정간 관광열차가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역시 관광객을 태운 모노레일이 다니고 있다.하지만 난 부산에 살면서도 아쉽게도 두 개 다 타보지를 못했다.
"그런 사진 찍어서 뭐 하는교?"
철길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K가 물었다. '글을 쓸 때 소재 삼으려고 한다'고 했더니, 다음부터는 아예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으라고 안내를 했다. 송정~해운대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바닷가 철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데크 길이 있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내리는 호젓한 길이 있는데, 우리는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완전히 노출돼서 햇살 뜨거운 데크 길보다는 그늘도 있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숲길이 좋았다. 숲길 중간에 한 번씩 전망대가 나오는데, K는 그때마다 나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성화였다. 나는 뭐 바다 풍경이 다 거기가 거기라서 됐다고 했더니, 그래도 '포토존'이라며 꼭 찍으란다. 성화에 못 이겨 '포토존'을 찍었다.
해운대에 이르니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외국인들도 많았고 들리는 억양으로 미루어 보아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해수욕장을 따라 걷다가 시장통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K가 맛집이 있다며 중국집으로 안내하였다. 나는 사천짜장을, K는 삼선짬뽕을 시켰다.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전달할 때 중국어로 말하는 걸 보니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이었다. 우리는 먼저 소주를 한잔씩 했다.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속이 짜르르했다. 그 집 음식은 먹을만했다. 식사를 하면서 소주 몇 잔을 걸쳤더니 배도 부르고 기분이 나른한 게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30년이 넘게 그 회사를 다녔고, K는 중간에 나와 개인 사업을 하고 있지만 사는 건 비슷비슷하다. 성격은 많이 다르지만 여태껏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었다. 좋아하는 기호식품이나 취미도 달라서, K가 담배 피울 때 나는 옆에서 기다려 주고, 내가 사진 찍을 때는 K가 기다려 주었다. K는 까칠한 듯하면서도 정이 많다. 늘 전화를 하는 쪽은 K이고, 대신에 나는 반갑게 받는다. 내가 K를 좋아하는 이유다.
"우리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이렇게 산책이나 합시다!"
인사를 나누고 K와 헤어졌다. 시내버스를 타고 빈자리에 앉으니, 많이 걸어서 피곤하기도 하고 한잔 술에 기분도 알딸딸해서 눈꺼풀이 자꾸만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