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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Sep 06. 2023

이거 됩니까? 저거 됩니까?



"기업경영에서 '공헌이익'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데 우리 회사에서는 공헌이익을 계산할 수 있는지요. 먼저 가능 여부를 메일로 알려주시고 자세한 사항은 제가 회사에 복귀하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 보니 간밤에 미국 출장 중인 사장님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난 사장님이 단순히 미국지사를 둘러보러 가신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시간을 내어 현지 대학교에서 개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셨고, 얄밉게도 내용 중에 그 '공헌이익'이란 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또 골치 아프게 생겼군!"


회사에서 ERP 시스템을 구축할 때 CO(관리회계) 모듈러로 참여하여 회사의 표준원가 계산 및 수익성 분석 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때 사실은 '공헌이익 개념을 도입할까?' 하고 망설였었다. 하지만 워낙에 구축하는 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고 컨설턴트도 처음 ERP를 구축하는 회사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말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스템을 너무 복잡하게 설계하면 운영상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서 포기하였었다.


그런데 아뿔싸! 사장님 입에서 '공헌이익'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나는 별수 없이 ERP 시스템에서 공헌이익을 계산해내야 함을 직감하고, 이왕에 하는 것 데이터의 유용성을 높이기 위해 '제품별' '사업별' '고객별'까지 세분하여 공헌이익을 계산키로 마음먹고 사장님께 보고드릴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 매출이 20% 늘면 영업이익이 얼마나 증가할까요?


- 영업이익 30억을 달성하려면 매출이 얼마나 늘어야 하나요?


- A거래선에서 물량 30%를 더 주문할 테니 단가를 10% 낮춰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될까요?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공헌이익 개념이다.



사장님이 귀국하시고 면담 자리에서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한글로도 어려운 내용을 그것도 원서로. 사장님은 외국 출장을 다녀오시면 전혀 기대하지도, 반갑지도 않은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원서 책자였다. 원서 책은 영어 실력이 그다지 깊지 않은 나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장님이 주신 책을 안 읽을 수도 없고 말이다.


", 죽겠네!"





그렇게 해서 ERP 시스템을 구축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시스템을 다시 갈아엎는 대대적인 작업을 해야 했다.


공헌이익 = 매출액 - 변동비


즉, 공헌이익을 산출하려면 회사의 생산 및 영업활동에서 발생하는 원가와 비용을 '고정비''변동비'로 구분하여야 한다.


'변동비'는 매출액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비용으로 재료비, 직접노무비, 동력비, 물류비 등이 대표적이고, '고정비'는 매출액과 상관없이 일정 금액이 고정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으로 감가상각비, 임차료, 간접노무비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론과 달리 회사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비용 중에는 변동비, 고정비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회사마다의 사업 특성과 비용 산출의 용이성, 데이터의 가용성 등을 고려하여 시스템을 설계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건 향후 운영 및 유지관리를 고려하여 가능한 한 단순하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CO(관리회계)와 PP(생산관리) 모듈을 뒤집어엎는 3개월간의 프로젝트를 거쳐 회사의 공헌이익 계산 프로세스가 완성되었다.


공헌이익 개념은 '손익분기점(BEP, Break-Even Point) 분석' 또는 'CVP(Cost Volume Profit) 분석'이라고 해서 기업경영을 할 때 의사결정을 위한 유용한 판단 기준을 제공해 주는 툴이다.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나고 데이터의 신뢰도 검증이 끝난 후, 회사의 경영회의 자리에서 각 사업별, 제품군별 손익분기점 분석자료를 보여주었다. 이후 사업부별로 사업부장님과 팀장들을 대상으로 사업별 특성에 맞게 데이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설명하였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어떤 사업부에서는 사업전략을 짤 때 이 데이터를 활용하여 주력해야 할 제품군과 고객군을 잘 선정하여 실적을 대폭 개선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사장님은 사람을 편하게 놔두지 않고 참 많이도 괴롭히셨다. 늘 책 읽고 교육받는 것을 좋아하셔서 외부 세미나에 자주 참석하셨는데 좋은 내용을 듣고 오시면 꼭 회사에 적용하려고 애를 쓰셨다.


한 번은 세미나에 다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활동기준원가(ABC, Activity Based Costing)라는 게 있는데 우리도 이것을 도입해서 보다 정확한 원가산출을 해야겠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또 뭘 한다고?!"


사장님은 그냥 한마디 던지는 것이지만 밑에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말씀은 한마디이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정말 굵직한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활동기준원가'는 회사에서 발생하는 비용 중 간접비를 활동기준으로 세분화, 계량화하여 배부함으로써 보다 더 합리적이고 정확한 원가를 산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하나 실제 기업현장에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과 애로가 따른다. 따라서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나 사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도입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 생산하는 제품 구성이나 사업 특성을 고려할 때, ABC 원가계산에 들어가는 관리비용 대비 얻어낼 수 있는 효과가 미미하여 괜히 사람들만 고생시킬 것이 뻔하였다. 특히 사장님께서 조직 변화를 자주 도모하시므로 향후 지속적으로 큰 부담이 될 유지보수 문제도 무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맘먹었다.


현재의 간접비 배부 기준과 ABC 기준과의 차이를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드렸다. 기준을 세분화 계량화할 경우 이론과 다르게 현실에선 더 많은 오류가 생겨 오히려 데이터의 유효성이 떨어진다는 점, 투하되는 관리비용 대비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 등 여러 가지 근거를 들었다. 내 설명을 듣고 난 사장님께는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해를 해주셔서 ABC 원가계산은 없던 일이 었다.


사장님은 이론과 학문적 관심으로 이것저것을 주문하셨고, 그때마다 나는 현실적 경험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방어를 하느라 땀을 흘렸다. 사장님과 나 사이에 회사의 관리체계에 대한 밀당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사장님은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으로, 나는 그런 사장님을 방어하기 위해 실전경험에 덧붙여 이론적인 능력을 쌓느라 공부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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