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철은 짧은 여행을 마치고 심신이 지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반면에 혜연은 MT가 재미있었던지 당초 예정보다 하루 늦어 그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상철은 혜연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지만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혜연아, 잘 다녀왔니? 많이 탄 걸 보니까 건강해 보이는 게 좋네."
"오빠는 집에 잘 갔다 왔어? 부모님은 안녕하시고?"
"으응... 그래."
상철은 애당초 놀러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집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자, 이거. 별건 아니고 오빠 주려고 하나 샀어"
혜연이 선물을 내밀었다. 그것은 책상 위에 올려두는 조그만 남녀 한쌍의 목각인형이었다.
"고맙다, 혜연아."
"오빠, 나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어. 내일 봐."
혜연은 방으로 들어갔다. 상철도 다행이다 싶어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상철은 혜연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밖으로 나갔다. 학교에도 가기 싫어서 맨 처음에 도착하는 버스에 그냥 올라탔다. 그리고 종점까지 가서 내렸다. 상철은 슈퍼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산으로 향했다. 땀을 흘리며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동안 모든 잡생각을 잊으려고 노력하였다. 상철은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망루까지 올랐다. 날씨가 좋은 날엔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했는데, 그날은 너무 더워서인지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생긴 해무가 짙게 끼여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등줄기에 흐른 땀을 말려주었다.
상철은 그늘에 앉아 산 아래를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혜연을 어떻게 보나' 하는 고민이 또다시 밀려왔다. 상철이 비록 맨 정신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분히 미선의 적극적인 공략에 넘어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상철 스스로 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혜연과 헤어질 수도 없고, 자신이 다른 데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상철은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혜연을 위해 더욱 노력하자고 결심하고 산을 내려왔다.
상철은 열흘쯤 지난 뒤 학교에 갔다. 영철이 연락을 해와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분수대 광장의 벤치에서 둘이 만났다.
"야, 너 왜 학교에 안 왔냐? 몇 번씩 연락해도 받지 않고."
영철이 따지듯 물었다.
"그냥 마음이 내키질 않아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즐거운 여행도 되질 못하고."
"그래, 사실은 내가 더 미안하다. 너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만 남자가 좀 대범하질 못하고 왜 그렇게 좀스럽냐?"
그곳에서 그렇게 된 후 상철과 미선과의 관계가 어색해졌고 결국은 모두 즐거운 여행이 되질 못했었다. 그러나 영철은 자기가 원했던 바를 이루었고 돌아와서도 수진을 계속 만나게 되었으니 당초 여행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기는 했다.
상철은 영철의 손에 이끌려 다시 그 맥주집으로 향했다. 수진은 영철을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자리에 앉자 상철을 보며 눈을 흘겼다.
"상철아, 너 미선이가 얼마나 화가 난 줄 아니?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미선한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어휴 짜증 나!"
상철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미선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일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여자로서 남자한테 무시당한 참담한 기분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상철은 한편으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오로지 혜연 생각에 미선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미안해! 미선이를 무시한 것은 전혀 아니었어. 나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수진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만회할 기회를 만들어볼 테니까 잘해야 돼. 걔가 그래도 남에게 그렇게 무시당할 정도로 살지 않아서 상당히 큰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
사람과의 인연이란 게 참 묘해서 칼로 무를 베듯 쉽게 자를 수가 없는 것인지 상철은 미선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하숙집으로 영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야, 영철이. 지금 그 맥주집으로 나와라. 조금 있다가 수진이랑 미선이랑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래, 알았어."
한 시간쯤 지난 뒤 상철이 맥주집 문을 밀고 들어서자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상철아! 여기야."
영철이 손을 들며 상철을 불렀고 상철은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수진과 미선이 한쪽으로 앉아있었고 영철의 옆자리에 상철이 앉았다. 미선은 그때까지도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 영철이 상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상철이 주저하면서 미선에게 말을 걸었다.
"미선 씨, 오랜만이네요. 저번 일은 제가 실수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수진이 한 마디 거들었다.
"상철 씨가 사과하는데 이제 화 풀어. 자, 얼굴도 한번 보고."
미선이 그 자리에 나온 것도 어느 정도 사과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이었으므로 그녀는 상철을 보며 말했다.
"상철 씨 얼굴을 두 번 다시 안 보려고 했는데, 오늘 한번 지켜보겠어요."
"고맙습니다."
비로소 모두들 긴장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맥주를 한 잔씩 마실 수 있었다. 두 시간쯤 있다가 모두 일어섰고 날이 날인 만큼 수진도 마담 언니한테 말하고 같이 따라나섰다.
일행은 강 하구둑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철이 사과도 할 겸 술을 한잔 사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에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술집이 몇 곳 있었는데, 그들은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상철은 안주로 푸짐한 닭찜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술을 마셨는데 다들 주량이 상당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잠깐만에 소주 몇 병을 비웠다. 상철은 미선과의 서먹했던 관계를 의식해서 최대한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현재의 분위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였다.
배도 채우고 술도 적당하게 마신 그들은 술집에서 나와 강변으로 향했다. 영철과 수진이 팔짱을 끼고 앞장서 걸었고 상철과 미선이 뒤를 따랐다. 미선이 상철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상철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그냥 부담 없이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재밌게 지냈으면 해."
"알았어, 미선 씨. 나도 미선 씨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또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지."
상철과 미선은 강변에 빽빽하게 자라있는 갈대숲을 헤치고 들어가 제방 둑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영철과 수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는 인적이 없었고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와 시원한 강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 위로는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없이 강변 풍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상철이 왼팔을 들어 미선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미선이 상철의 품에 안겨왔다. 술기운 탓인지, 먼저번의 경험 탓인지, 미선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미안함 탓인지, 상철은 그날 미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미선의 몸이 탐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는 밤. 갈대가 그들을 적당히 감싸주었고 그밖에 둘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풀벌레 마저 숨을 죽였고 상철과 미선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강 하구둑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미선이 상철의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철 씨, 오늘은 그냥 헤어지기 싫어. 우리 집으로 가자."
"뭐? 그래도 괜찮아?"
"같이 지내는 언니가 고향집에 다니러 갔거든. 그래서 아무도 없어."
미선은 아는 언니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은 혼자라고 하였다. 상철은 잠시 망설였지만 오늘만큼은 미선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미선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상철이 미선이 사는 방에 들어서자 여자들만이 거처하는 곳이라 그런지 깨끗하게 정돈된 방안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향긋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이 방에 남자가 온건 상철 씨가 처음이야."
미선이 말했다.
미선은 포장도 뜯지 않은 속옷을 상철에게 건네며 먼저 씻으라고 하였다. 여자들만 사는 집에 남자 속옷이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린 상태였기 때문에 상철은 속옷을 받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철이 씻고 나오니 미선이 파자마를 내어 놓았다. 그리고 옷이 더럽혀져 세탁기에 넣어 세탁 중이라고 하였다. 상철은 이제 꼼짝 못 하고 그 집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철이 여자들만 사는 방을 뚤레뚤레 살펴보는 사이 미선이 샤워를 하고 머리에 하얀 수건을 감고 나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가벼운 안주거리와 함께 내어 놓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맥주는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데 충분했고 가슴도 탁 트이게 해 주었다. 둘은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늦도록 켜져 있던 불이 어느샌가 꺼지고 방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둘은 깊은 늪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