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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Oct 20. 2023

사랑 그리고 또 다른 이별

파란 대문 하숙집 #8/8(최종회)



깊고 푸른 밤. 캄캄한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그 사이로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물고 떨어지고 있었다. 상철은 유성을 보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소원을 빌었다. M16 소총을 쥔 채 총구를 거치대에 걸쳐놓고 전방을 노려보는 상철의 눈에 산능선의 실루엣과 '오라 북으로!' '뛰면 5분!' 등의 입간판이 들어왔다. 물론 어두운 밤이라 입간판의 글자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도 없이 보아왔던 그 글자가 상철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남측 고지와 북측 고지 사이의 넓은 평원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확성기 소리가 상철의 귓가를 웅웅 거리며 맴돌았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던 작년 가을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작년 9월. 개강을 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혜연 몰래 미선을 가끔 만나는 상철의 이중생활이 계속되었다. 미선이 상철한테 둘 사이의 관계를 강요하거나 어떤 짐을 지워준 것은 아니었지만 상철은 깨끗하게 끝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미선의 탄탄한 육체가 상철을 끈질기게 유혹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시간들이 계속되자 혜연이 뭔가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같은 집에서 살다 보니 상철의 빈자리를 알 수 있었고, 그때마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니 자연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상철은 혜연에게 거짓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사랑스러운 혜연만을 위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미선을 그만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수도 없이 했지만 막상 미선을 마주하면 그러질 못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10월 어느 날이었다. 상철이 미선과 함께  술집에 앉아 있는데 여자들 서너 명이 재잘거리며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혜연과 해수욕장도 함께 가고 나이트에도 함께 갔던 재영이라는 혜연의 단짝 친구였다. 상철은 얼른 고개를 숙여 외면하였지만 그들 일행이 상철 쪽으로 왔고 재영 상철을 알아보았다. 밤에 남녀가 단둘이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면 분명 보통 사이가 아닐 것이었다. 그것 보다도 여자의 직감으로 느꼈을 것이었다.


상철은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재영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재영도 우뚝 멈춰 서서 놀란 눈으로 상철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외면을 하고 친구들을 따라 다른 쪽으로 가서 앉았다.


"상철아, 쟤 누구니?"

미선이 물었다.


"응, 그냥 아는 동생이야."


상철이 얼버무렸다. 하지만 상철의 얼굴에 나타난 당혹한 표정으로 미선은 눈치를 챘을 것이었다.


"미선아, 그만 일어나자."


상철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미선도 뒤따라 나왔고 상철은 버스 정류장에서 미선을 먼저 태워 보내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상철은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침묵의 며칠이 흘렀다. 분명히 재영이 혜연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혜연이 알았을 것인데 상철을 찾지 않았다. 상철은 더더구나 혜연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던 상철이 결심을 하고 미선을 찾았다. 미선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카페 근처에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밤 11시가 넘어 근처 술집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술잔에 술을 한 잔씩 따르고 상철이 입을 열었다.


"미선아,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이제 그만 만날 때가 된 것 같아."

"..."


미선은 아무 말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 상철이 따라서 술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그동안 네가 잘해준  알아. 그리고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참 좋았어. 하지만 어차피 갈 길이 다르고  이번 학기가 끝나면 나 군에 가."


미선이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나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고 있는 네 마음 알아. 함께 있을 때 나에게 잘해주면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지. 마치 마음이 딴 데 가있는 모습이랄까. 그래도 막상 이렇게 헤어진다니 섭섭하다. 네가 군에 가면 안부나 전해줘. 편지는 해도 되니?"


"응. 영철이를 통해서 주소를 알려줄게."


둘은 그렇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미선은 정말 쿨한 여자였다. 상철은 미선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나마 그렇게 정리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상철은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렸다. 오뎅국물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상철은 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상철과 미선이 사랑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 육체적 관계로 이어진 사이였으니까 크게 상처받을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미선의 옆자리를 채워 줄 남자가 금방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인지도 몰랐다. 상철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하숙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며칠 뒤 상철은 혜연에게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둘은 시내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곳은 주로 조용한 음악을 들려주는 분위기 좋고 커피 맛 좋은 곳으로 둘이 가끔 만나던 장소였다. 상철이 먼저 도착하였고 조금 지나서 혜연이 도착하였다. 그동안 맘고생을 많이 했는지 혜연의 얼굴이 수척해 보여 상철은 마음이 아팠다. 괜히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을까? 사실 혜연에게 상철은 첫 남자인 셈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상철을 만나 다른 남자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혜연일 아프게 하다니...


"혜연아,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

"재영이한테 들었겠지만 지난번에 나하고 같이 있던 여자는 네가 신경 쓸만한 그런 사이가 아니야."


상철은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이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피하라고. 사실을 다 털어놓으면 상철의 속은 시원하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혜연의 마음은 어떨까? 그렇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너무 이기적인 일이지 않을까? 상철이 다시 말했다.


"혜연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거야. 믿어줘!"


"오빠..."


혜연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상철은 혜연의 예쁜 눈에 자신이 자꾸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오빠, 재영이에게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 당장 오빠한테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오빠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용기가 안 났어. 아무 말도 없는 오빠를 보면서 이젠 끝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 오빠는 이미 내 가슴에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 말이야."


혜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심했어. 오빠가 그 여자와 어떤 사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냥 다 받아들일 거야. 거짓말인지도 모르지만 별 사이가 아니라는 말 고마워. 나는 그걸로 충분해."


상철은 생각했다. 아, 내가 천벌을 받을 놈이었구나! 이렇게 착한 혜연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다니.


"혜연아, 두고 봐. 말로 백 번 하면 뭐 하겠니? 내가 행동으로 보여줄게. 너만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은 카페를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철 지난 바닷가 모래사장은 썰렁했지만 연인들이 찾을 공간은 충분히 있는 곳이었다. 둘은 모래사장 끝에 있는 한 카페로 들어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수에 찬듯한 눈으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혜연의 모습은 정말 예뻤다. 한참을 그런 혜연을 쳐다보다 상철이 입을 열었다.


"혜연아, 그런데 내가 얼마 있으면 군대에 가게 . 이미 신체검사는 받아 놨고 휴학계만 내면 바로 영장이 나오게 되어 있어."


"뭐? 정말?"

혜연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하고 한참을 헤어지게 되는 게 아쉽지만 네가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군대에 갔다 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아니 무슨 소리야?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나보고 오빠 보고 싶은 걸 어떻게 참고 있으라고..."

혜연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혜연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기다려 줄 거지?"


"알았어... 꼭 기다릴 거야."


"군대에서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 남자가 사고를 많이 친데. 너도 나 일 내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하게 있어야 돼. 알았지?"


혜연이 눈을 흘기며 상철을 쳐다보았다.


"내가 고무신 거꾸로 신는 거 걱정하지 말고 오빠나 잘해. 군대 주변에 술집여자들이 많다는데 괜히 걔네들 쫓아다니지 말고."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눈물이 맺힌 혜연의 눈가에 미소가 담겼다. 둘은 카페를 나와 팔짱을 끼고 바닷가를 나란히 걸었다. 바닷바람이 매서웠지만 상철의 마음은 더없이 훈훈하였다.




상철은 2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냈고 휴학계를 내고  달이 지나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상철은 혜연과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혜연의 온전한 모습을 눈에 꼭 담고 싶었다. 그래서 혜연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고 혜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하여 좀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상철은 부모님께도 입대사실을 알릴 겸 이틀 전에 집에 올라갔고, 혜연은 이틀 후에 부모님께 MT를 간다고 말씀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둘은 서울에서 만나 강릉을 거쳐 설악산으로 갔다. 눈 덮인 설악산의 풍경은 정말 좋았다. 도착한 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랐다. 멀리 둘러싸인 내설악 봉우리를 쳐다보고 산 아래 설경을 감상하고 산장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내려왔다.


둘은 그날 밤 모텔에서 함께 지냈다. 상철은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고 또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날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상철은 양초를 켜고 방의 불을 껐다. 잔에 와인을 채우며 말했다.


"혜연아, 이 잔의 붉은 와인은 우리들의 피나 마찬 가지야. 우리의 붉은 피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 잔 속에 담겨있는 거야."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잔을 들었다.


"영원한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우리의 꿈을 위하여!"


둘은 와인을 쭉 마셨다. 혜연의 사랑이 상철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고, 상철의 사랑이 혜연의 목젖을 축이며 넘어갔다. 그들은 함께 와인을 마시며 그 밤을 보냈다. 상철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같이 즐겁게 웃기도 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뭔가 공허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둘은 울산바위에 올랐다. 겨울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산행은 조금도 힘들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울산바위에 오르자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고 아름다운 설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둘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며 지나갔다. 둘은 손을 모아 크게 외쳤다.


"정혜연! 사랑해!"

"이상철! 사랑해! 기다릴게!"




보름 후 상철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다. 논산훈련소에서의 신병훈련과 다시 사단 보충대에서 보충훈련을 받고 최전방부대로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휴전선에서 초병근무를 서게 되었다. 저 멀리 북쪽 산에 꽂혀 있는 '오라 북으로!' '뛰면 5분!' 등의 입간판이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다. 소총을 들고 주시하는 전방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한 장의 스틸 사진 같았고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넓은 평원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양측의 확성기 소리만이 그나마 시간의 흐름을 이어주고 있었다. 앞으로 2년간 이런 생활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상철은 생각했다. 그때까지 혜연이 기다려 줄까? 남녀가 만나 사랑하게 되면, 여자는 그 남자가 자기의 마지막 남자이길, 남자는 자기가 그 여자의 첫 남자이길 바란다는 말이 있다. 자신은 혜연의 첫 남자일까, 마지막 남자일까? 상철은 확신했다. 자신은 혜연의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라는 것을. 왜냐하면 자신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에 대한 믿음. 그것 만이 둘을 연결해 주는 끈이 될 것이었다.


사.랑.해.정.혜.연.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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