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똥 따는 남자의 마음

그 남자의 횡설수설

by 이은호



"지난번에 선물 들어온 죽방멸치가 어딨지요?"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물었다.


"왜요?"


"어, 심심할 때 멸치볶음 한번 해보려고."


"여기 이걸로 하면 돼요." 아내가 냉동실 문을 열고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 들고 말했다.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내가 친구들과 5일간 여행을 떠난 동안 난 멸치볶음을 만들지 않았다. 사실 멸치가 든 비닐봉지를 꺼내 들기는 했었다. 그러나 막상 텅 빈 집 거실에 혼자 앉아 멸치 똥과 씨름할 생각을 하니 스스로 너무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마 시작하지를 못하고 설연휴 때 만들어 둔 만두만 먹었다. 떡만둣국에 찐만두에 군만두에 만두라면까지. 그것도 사실 조금 처량한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아내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시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드디어 냉동실에서 멸치가 든 비닐봉지를 꺼냈다. 쟁반에 멸치를 쏟아놓고 옆에 빈 그릇 놔두고, 한 놈 한 놈 잡아서 대가리 따고 똥을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큰 놈이건 작은 놈이건 죄다. 그날도 아내는 집에 없었지만 서글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단순반복작업을 한다는 건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휴식의 시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흐름에 맡기다 보면 시간도 잘 간다. 뭐 돈내기도 아니니 서둘러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쉬엄쉬엄. 그런 의미에서 심심할 때 멸치 똥이나 따는 것은 아주 적절한 행위이다. 느릿느릿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북하던 멸치가 어느새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멸치 똥 따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그간 밑반찬 중에 멸치볶음이 몇 번 등장했었다. 아내가 만든 것은 아니고 반찬가게에서 사 오거나 지인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치아건강이 그다지 좋지 못한 나에게는 너무 딱딱했고, 대가리와 내장이 그대로 붙어있어 맛이 썼다. 그래서 다 먹지 못하고 번번이 남은 것을 버리곤 하였다.


삼식이 주제에 좋으니 싫으니 반찬투정 할 입장이 되지 않는 나는, 내가 먹을 거는 내가 만들자 싶었다. 어찌 되었건 먹고 싶은 건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멸치 똥을 따게 된 것이었다.




자, 멸치 똥은 다 땄고, 이제 멸치볶음을 할 차례. 인터넷에서 찾은 멸치볶음 레시피를 참고하여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친절하게도 많은 선생님들이 사진과 곁들여 요리법을 알려주니, 아무리 요알못인 나이 든 남자라도 웬만한 건 따라 해볼 수 있는 세상이다. 내 요리의 제목은 '꽈리고추 멸치볶음'. 양념은 간장베이스로 하고 올리고당, 설탕, 다진 마늘, 청양고추, 참기름 등을 눈대중으로 맞춰 넣었다. 그래도 요리 몇 가지를 해봤다고 영 낯설지는 않았다.


먼저 멸치를 볶는데, 소주를 조금 붓고 볶으면 멸치비린내를 잡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덕분에 남은 소주 한 잔을 마셨다. 캬-. 처음에는 강불로 볶다가 중불로 줄여서 볶는데, 타지 않게 계속 저어주어야 한다. 다음은 적당한 크기로 자른 꽈리고추를 양념장과 함께 졸여준다. 꽈리고추가 숨이 약간 죽으면 볶아둔 멸치를 넣고서 양념국물이 없어질 때까지 볶아준다. 깨를 뿌리고 섞어주면 완성.


맛을 보니 달콤 짭조름한 게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덕분에 소주 한 잔 더, 캬- 좋다. 한 김 식힌 후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하면서 조금씩 꺼내 먹으면 된다. 그래, 술은 석 잔이지! 한 잔 더, 캬-. 그러고 보니 이게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그렇게 생존스킬 한 가지를 득템 하였다. 사실 멸치볶음은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끼니마다 아내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생존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바쁘다. 일주일에 한 개씩만 연마해도 일 년이면 오십 개. 그 정도면 어엿하게 독자생존의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 싶다. 남자가 나이 들어서 집에 있을 때 아내가 곰국을 끓이면 무섭다고 했는데, 적어도 그런 불안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어, 내 걱정 말고 편하게 다녀와요."


어느 때건 아내가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할 때, 곰국이 됐건 만두가 됐건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잘 다녀오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 그 자신감. 그것은 다 나의 독자생존 능력에 달려 있다. 멸치 똥을 따면서, 서글픈 마음을 떨쳐내면서, 멸치 똥 따는 행위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든 생각이다. 앞으로는 혼자 있을 때, 멸치 똥 따면서 절대로 서글퍼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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